나를 키운 시간들
큰 아이가 보조바퀴를 떼기 전이니까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초인 것 같다. 집 앞 공원에서 나와 동생과 셋이 숨바꼭질을 하다가 유치원 친구를 만나서 자전거를 탄다고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바지단을 들고 절뚝대며 걸어왔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작은 아이가 이게 뭐냐는 질문에 끝도 없이 대답을 해주고 있었을 거다.
개미와 민들레와 까치와 참새, 모종삽 같은 것들.
형이 있어 일찌감치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뗀 친구를 쫓아서 있는 힘껏 달려가다가 제풀에 옆으로 넘어졌던 모양이었다. 늘 붙어 있던 밴드 옆으로 긁힌 자국이 보였다. 나를 쳐다보면서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오는 저 표정이 이상하게 끌려서 사진을 찍었었다.
친구가 저 혼자서 쌩쌩 자전거를 타고 앞서 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해 죽겠는데 그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으니 아이는 무척 창피하고 분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달려 나가 아이를 안아주고 호 하고 불어 주지 않았다.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이 금세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제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한 손으로 끌고 오는 저 아이가 내 앞에 다 온 다음에야 안아주었다. 물어봐 주었다.
아 저 눈빛, 보호와 공감을 염원하는 저 표정이 왜 지금에야 마음을 찢어 놓는 것 일까.
어제 ebs 다큐멘터리 아동학대 자진신고 1년의 기록 "내 이웃의 아이"를 보았다. 엄마는 울고 반성하면서도 아이에게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손을 댄다.
어느 날 엄마는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신을 아동학대 가해자로 신고한다. 이후로도 엄마는 엄마의 힘듦을 공감하고 제 능력 안에서 도우려 애쓰고 엄마와 싸움 대신 대화를 하고 싶다는 아홉 살 아이를 다시 학대하고 때린다. 결국 아이는 엄마와 즉각 분리되어 아동보호센터에서 생활한다. 엄마는 후회를 하면서도 아이를 찾아 면회하지 않고 아이도 엄마 없는 공간에서 부쩍 자란다. 끝없이 엄마를 이해하려던 아이와 학대를 인지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못하는 엄마.
그때 사진을 찍는 대신 달려갔어야 했는데.
나는 아이와 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을까.
다큐멘터리의 엄마처럼 때리고 소리치지 않은 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나도 분명 내 어려움을 약한 아이에게 화풀이했었고 아이를 눈치 보게 했었다. 아이가 고스란히 나의 감정을 받아줄 수밖에 없는 약자라서 그랬다. 내 것 이니까라는 마음으로 그랬다. 그러고 나서는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그런 마음을 함부로 먹을 수 있었는지 나는 모성이 없나 보다고 매번 자책했다.
서툴고 고약한 나의 훈육으로도 아이가 그럭저럭 잘 커준 것이 그저 고맙다. 다행스럽다.
아이가 나를 키웠다는 말, 눈물이 나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