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야 50분이 지나갔다. 물 한 잔을 마시며 땀을 닦고 있는 내게 필라테스 센터 원장님이 말했다.
“나니 님, 잠깐만 앉아봐요. 나니 님에게 할 말이 있어요.”
최근 종종 투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뭔데요? 또 물어볼 것 있어요?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나니 님, 저 센터 옮기기로 했어요.”
“응? 센터를? 옮겨? 어디로요?”
“곡반정동이라고, 나니 님한테는 좀 멀 것 같아요. 차로 20분 걸려요.”
이런. 지금 다니고 있는 센터는 현재 사는 집 바로 옆 건물 17층이다.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되어 있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아무런 걱정 없이 운동을 다닌 지 벌써 3년 반째다. 원장님을 비롯해 선생님들이 너무 좋은 것이 센터를 옮기지 않고 다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집에서 몹시 가깝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20분? 차로? 머네… 엄청 멀다. 난 못 가. 절대 못 가요.”
“알아요. 나니 님 안 올 거 알아요. 그래서 제가 엄청나게 고민했어요. 센터 옮기면 나니 님 이제 못 볼 텐데, 나니 님은 절대 안 올 텐데… 그럼 너무 서운한데 어쩌지, 하면서요. ”
내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새로 옮겨가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원장님도 알았고 나도 알았다. 어쩔 수 없죠, 옮기는 그날까지 열심히 해야지 뭐, 하며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나나 원장님이나 서로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우리는 본 듯했다.
이 건물에 입점해 있는 필라테스센터가 열 개도 넘었다. 한 곳에만 3년 넘게 다녔으니, 새로운 센터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센터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할 날짜가 다가오니 점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고작 일주일에 세 번 가는 운동 센터일 뿐인데, 왜 운동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지 이상했다. 언제부터인지, 쉽게 놓아버리는 쪽이 더 쉬워졌던 나였다. 나는 왜 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보고 싶어졌을까.
백수 생활을 해오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단절됐던 것은 서로의 공동 관심사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인 이유가 가장 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들이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나는 내게 끝없이 물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뭔가 대단한 것을 해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채우면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당장의 만족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행복한 내일을 꿈꾸는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서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급한데, 넌 참 한량 같다, 는 말도 들었다.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 언젠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는데,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내게 함께 그 길을 가보자고 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조차도 얼마 전까지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며 그들이 사는 방식으로 살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배우거나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없어질 무렵 만난 것이 원장 쌤이었다. 일 년이 넘게 나는 운동에만 집중했다. 처음 운동을 시작한 것은 모든 치료가 끝난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이니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누군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낯선 누군가와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조차 꺼려지던 때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운동하러 가서 원장 쌤을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이곳 센터도 그녀의 일터일 뿐인데, 어떻게 저 사람은 아침마다 저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살면서 걱정이라는 것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하는 해맑은 얼굴로 회원들을 맞이했다. 어쩌다 하루쯤은 에너지가 조금 약할 날도 있어야 할 텐데 하루하루가 같았다. 인생이라는 게 저렇게 행복하기만 하지 않을 텐데,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녀를 알고 싶은 마음 반, 조금 더 강한 강도의 필라테스를 해보고 싶은 마음 반을 더해 원장 쌤과의 개인 레슨을 시작했다. 우리는 한동안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수업 시간 앞, 뒤, 잠시 숨을 골라야 하는 쉬는 시간에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나니 님의 정체에 대해 진짜 진짜 궁금했어요, 하는 원장 쌤의 이야기에 나는 천천히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일해야죠, 라던가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나니 님, 나니 님은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제가 나니 님 상황이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만 있을 텐데요.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이것저것 배우고,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들 다 챙기고. 와, 나니 님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나니 님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녀를 보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였는데, 어떠한 편견도 없이 나를 그저 예쁜 마음으로 봐주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그녀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장 쌤은 물론이고 함께 하는 강사 선생님들도 모두 경력이 오래됐고 아주 훌륭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이런 좋은 센터에 왜 이렇게 회원이 적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점점 어려워지는 센터 운영에 원장 쌤의 마음이 참 힘들었을 테지만, 회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는 원장 쌤이 어쩔 땐 안쓰러웠고 어쩔 땐 대견했다. 우리는 그렇게 때론 친구처럼, 때론 언니와 동생처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센터로 옮겨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모든 센터에 체험을 가보고 결정해 볼까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로 20분이 진짜 먼 건가?’
“자기야. 필라테스 센터가 이사 간다고 했잖아. 차로 20분 걸린대.”
“응. 자기 그래서 다른 센터 체험 다 해 보고 결정한다며.”
“아니 근데, 차로 20분이면 먼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갈 만하지 않을까?”
“먼 건 아닌데, 집 근처 5분 거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자기한테 가까운 건 아니지.”
“맞아, 그런데, 그래도 이제 센터 이사 가면 쌤들 못 볼 텐데 너무 아쉽네. 그래서 말인데, 원장 쌤이랑 일주일에 한 번 개인 레슨만 하는 것은 어떨까? 그룹은 이 근처 새로운 곳을 찾아보고.”
어떠한 대답을 하더라도 내 마음이 이미 정해졌다는 것을 눈치챈 남자 친구가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일주일에 한 번은 갈 만하지, 뭐. 좋은 생각이야.”
“그렇지? 그러면 다른 동네 구경도 갈 수 있잖아. 운전도 하고. 차도 맨날 세워두기만 해서 아깝잖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타면 좋겠지? 일주일에 한 번은 갈 만한 것 같아.”
일주일에 한 번은 갈 만할 것 같았다. 없는 시간을 쪼개 운동하는 직장인이 아니었다. 사실 시간은 넘치게 남아돌았다. 그룹수업까지 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쯤이야 쌤들을 보고 수다도 떨고 하는 것이 어쩐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쌤, 나 할 말이 있어요. 나 개인 레슨은 새로운 센터로 계속 가려고 하는데.”
“응? 나니 님? 진짜 온다고요? 정말 올 거예요? 먼데? 진짜 20분 걸리는데? 진짜로 온다고요?”
“아니, 별로 안 멀 것 같아. 그룹 레슨까지는 못 갈 것 같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가 볼 만하지 않을까?”
바보 같은 원장 쌤의 눈가가 또 붉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저 멀리 보이는 호수를 쳐다봤다. 내가 원장 쌤을 더 오래 보고 싶었던 것처럼, 그녀도 나를 더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3번, 멀어진 센터에 간다. 개인 레슨만 받으려고 했지만 운전해서 가보니 어쩐지 별로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하루를 5분 단위로 또는 30분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대단히 바쁜 사람도 아닌데, 조금 멀어진 거리 때문에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
“쌤, 다녀보니까 별로 안 먼 것 같아. 그냥 그룹 레슨도 이쪽으로 계속 올게요. 다른 곳 체험하러 가는 것도 귀찮아.”
“나니 님 안 멀다고요? 스스로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하면 나야 좋지만 어쩌려고 그래요?”
그녀는 내가 센터를 옮기지 않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필라테스해 온 것에 대해 인정받은 느낌이 들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라는 가사의 노래를 내 주제가로 삼은 지 벌써 몇 년이다. 조금만 불편해도 인연을 끊어버리는 삶을 산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라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니 행복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안다. 그녀가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 와줬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