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달려도 될까

by naniverse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다소 엉뚱했다. 나는 갑자기 비키니가 다시 입고 싶어졌다.

4년 전, 암 치료가 모두 끝나고 다신 쓸 일 없는 몇 가지 물건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은 나의 빨간색 비키니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쩐지 신경 쓰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입어본 적도 없던 비키니다. 비키니는 어쩌다 떠나는 동남아 휴양지에서 한껏 멋을 부리기 위해 샀고 입었다. 이젠 배에 커다란 흉터가 보기 좋게 자리 잡았으니 더는 빨간색 비키니를 입을 일이 없었다. 온몸을 가리는 래시가드나 살까 하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더 고운 빨간색의 원피스 수영복을 샀다. 새로 산 빨간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할 때마다 새빨간 비키니를 입고 천진하게 물속에서 첨벙대던 나의 청춘이 그리웠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청춘의 그림자.


하지만 유방암 재발로 4번째 수술까지 마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 몸을 뒤덮은 흉터들. 그까짓 게 뭐라고.’

네 번의 수술과 온갖 치료를 마치고 겨우 덤으로 얻은 인생이다. 일 년을 더 살지 오십 년을 더 살지 모를 일이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살아도 아까운 인생인데, 비키니를 입으며 흉터를 드러내는 나를 그 누가 신경 쓴다고.

몇 날 며칠을 고르고 골라 초록색 줄무늬의 비키니를 하나 주문했다. 그깟 흉터가 어때서, 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래도 최대한 배의 흉터를 가리고 싶었다. 배꼽을 가리는 디자인으로 골랐다. 후크선장 갈고리가 덜 보이게. 얼마 후 떠날 발리 여행에서 한 번 입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흉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2년 정도 금주 해 왔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금주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한 잔 와인을 마시며 행복한 저녁을 누리는 삶을 택했다. 기름진 안주와 한 잔 술은 어느새 내 몸을 통통하게 살찌워 놓은 상태였다. 물이 오를 대로 올라버린 나의 허리가 도저히 비키니를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3년이 넘게 필라테스하고 있지만, 무엇 때문인지 전혀 정리되지 않은 허리선이었다. 나니 님, 유산소를 좀 해야 군살이 빠진다고요, 하고 말해준 쌤이 생각났다. 어차피 이번 발리 여행에서 비키니를 입는 것은 글렀다. 하지만 지금부터 호수공원을 조금씩 달려보면 내년 여행에서는 비키니에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가서 달려봐야겠다.


엉망진창 달리기 1일 차다. 집에서 호수공원을 내려다보니, 달리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여름이 거의 물러갔는지 열린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뛰기 딱 좋은 계절이 오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어쩐지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대로 된 러닝 복장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편한 반바지와 티셔츠 한 장을 입고 나섰다. 러닝용 운동화도 없으니 아무 운동화면 충분하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결심해 본다. 오늘은 딱 1km만 뛰어 보겠어.

사실 소싯적에 10km 마라톤을 10번이나 완주해 낸 경험이 있었다. 10년 전, 30대 중반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남자 친구와 친구들과 때론 회사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뛰는 것이 좋았다. 뛰고 나서 함께 먹는 고기가 맛있어서 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연습하고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뛰고 나면 무릎이 아파 일주일씩 걸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젊은 혈기로 10km쯤은 어렵지만 완주할 수 있었다. 이런 내게 1km라는 목표는 꽤 귀여워 보였다. 그땐 30대였고 지금은 40대이지만, 그래도 그쯤은 쉽게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500미터쯤 뛰니 호흡이 가빠오지만 그래도 온 만큼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라, 갑자기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누가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둔 것 같다. 얼마나 뛰었나, 보니, 고작 100미터를 더 뛰어 600미터 지점을 지나고 있다. 400미터를 어찌 뛰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와 죽을 것 같은데. 핸드폰을 슬쩍 보니 이제 800미터 지점을 지나고 있다. 목표했던 1km까지는 이제 200미터가 남았다. 멈추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다시는 뛰지 못할 것 같았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첫 번째 달리기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숨을 가삐 몰아쉬었다. 어쩐지 입안에서는 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필라테스 50분을 해도 이런 땀이 안 나는데. 땀이 안 나는 제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 나는, 고작 9분 25초를 뛰었다. 러닝을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이게 뛴 거야? 라고 할만한 페이스다. 그렇지만 온몸에 땀이 흘렀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찾았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씩 느껴졌다. 고작 1km를 뛰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나는 10km 마라톤을 완주한 것 같은 희열을 어쩐지 맛본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있다 보니 많은 사람이 내 옆을 뛰어 지나간다.

‘당신들, 이 좋은 것을 어떻게 알았어? 왜 나만 몰랐던 거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뛰었다. 무리할 생각이 없으니 아주 조금씩 늘려갔다. 삼 일을 내리뛰고 난 다음 날 새벽이었다.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발을 딛자 마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놀라 확인하니, 오른쪽 발바닥 아치 부분이 통통하게 부어올랐다. 눈으로만 봐도 부어오른 게 잘 보였고,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에 절뚝이게 됐다. 병원에 갈까 하나 우선 AI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래. 운동을 많이 해 온 사람들에게 1km는 아주 짧은 거리지만, 너처럼 몇 년 만에 뛰는 사람에게 km는 어마어마한 거리야. 네가 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뛰어서 이렇게 된 거야. 괜찮아질 때까지 절대 뛰지 말고, 무조건 쉬어. 괜찮아지면 아주 천천히 다시 시작하자. 예를 들면 1분 뛰고 1분 쉬는 거야. 그게 익숙해지면 2분 뛰고 1분 쉬는 거야. 그렇게 조금씩 늘려나가면 잘 뛸 수 있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AI의 답변에 어쩐지 감정이 상할 것 같았지만 틀릴 말은 아니었다. 초보 러닝에 대해 한참을 검색하다 보니 한 앱을 만나게 됐다. ‘런데이’ 한 번도 뛰어 보지 않은 사람을 8주 만에 30분 동안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해준단다. 이거다 싶었다. 1분 뛰기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AI 이야기처럼 나를 천천히 달리기의 세계로 인도했다.

1분 뛰기 같은 것으로 운동이 될까 싶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늘려나가는 프로그램을 따라 뛰다 보니 어느새 안 쉬고 25분까지 뛸 수 있게 됐다. 이제 겨우 3km 조금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도 뛸 수 있다. 대구 여행에서도 러닝화를 챙겼다. 거북이를 보러 떠난 발리 여행에서도 러닝화와 러닝복을 챙겼다. 뛰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매일매일 1분이라도 더 뛸 수 있게 되는 나를 확인하는 시간도 좋았다. 쉬지 않고 뛰다 보니 어쩐지 조금씩 허리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군살도 녹아내리게 되는 것 같아 좋았다.


“엄마 나 내년에는 10km 마라톤에 나가 볼까 봐.” 하는 내 말에 엄마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직 하지 마, 라고 말했다. 엄마 눈에는 나는 여전히 아픈 딸인 모양이다. 하지만 10km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면, 10년 전 첫 10km 마라톤을 완주했던 그날의 나처럼, 드디어 해냈다! 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1km도 뛰지 못했던 내가 다시 10km를 꿈꾼다는 건, 어쩌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회복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다시, 달려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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