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사건 이후로 본가에 있는 동안은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집에 갔다. 요샌 사이가 어때? 안 싸워? 하고 묻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이상하리만치 안 싸워. 엄마는 말을 착하게 하려고 애쓰고, 아빠도 화를 안 내. 화를 낼 때가 됐는데 그냥 웃어넘겨서 안 그래도 불안해.”
“엄마! 말이 씨가 되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이상하게 사이가 좋다는 엄마의 말이, 어쩐지 또 지난번처럼 큰 싸움을 불러올 것 같아 마음이 졸아 들었다. 엄마는 안방 옷장에서 아빠 코트를 하나 들고나오며 말했다.
“이거 엄마가 한 십 년 전에 아빠 사준 건데, 내일 이거 좀 입고 나가라고 하면 아빠가 입으려나?”
“엄마 그냥 아빠 입고 싶은 것 입게 두지? 요새 사이좋다며, 아빠 괜히 건드렸다가 정초부터 또 시끄러우면 어떡하려고 그래.”
“네 아빠 요새 엄마 말 엄청나게 잘 들어. 춥다고 목도리 두르라고 하면 두라고, 성당 갈 때 패딩 대신 얌전해 보이게 재킷 입으라면 입고 그래. 분위기 좋을 때 코트도 한 번 입으라고 하면 입지 않을까? 거의 안 입어서 아까워.”
엄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적당히 해, 하고 말할 새도 없이 엄마가 아빠 서재로 가며 아빠에게 말을 건넸다.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새해 아침부터 이렇게 평화의 시간이 또 끝나나 싶었다. 언제 끼어들어 이 싸움을 말려야 하느냐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몰래 듣는다.
“여보, 이거 코트 기억나? 자기 퇴직할 때쯤 내가 사준 것 같아. 이게 그대로 옷장에 있네. 자기 요새 재킷 입고 성당 가니까 엄청 멋있어 보이더라고. 내일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간다는데 재킷 가지고는 추울 테니 이거 입어 보면 어때요? 딸내미가 오늘 사 온 목폴라 티랑 입으면 예쁠 것 같은데. 드라이 해둬서 고대로네. 이게 더 따뜻할 것 같아.”
엄마의 첫 마디가 이상하리만치 길었다. 평상시의 엄마라면 왜 이 코트는 안 입어요? 하고 물었을 텐데, 엄마의 ‘왜’가 없어졌다.
“그런 코트가 있었어?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러지, 뭐. 근데 내일 그렇게 춥대?”
아빠의 대답도 평상시와 달랐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점퍼 차림을 좋아하는 아빠인데, 조금은 불편한 코트를,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입을 생각조차 안 했던 코트를 입으라는데 순한 양처럼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아빠 코트를 손에 들고 개선장군처럼 으쓱대며 거실로 나왔다.
“거봐, 엄마가 뭐랬어. 아빠 요새 엄마 말 엄청나게 잘 듣는다니까?”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두 분 왜 이렇게 친해지셨대?”
놀라운 변화였다. 지난번 눈물 젖은 신발 사건 이후로 엄마는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정말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게 될까? 이것이 엄마 생각의 시작이었다고. 아빠가 요즘 마음이 좀 힘들었다고 했다. 아빠의 친한 친구들이 올해 네 분이나 돌아가셨다. 대부분 지병을 알고 계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주까지 함께 식사했던 친구들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지병이 악화해 인사할 새도 없이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가까운 이들이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 아빠는 참 인생이란 게 뭔지 허무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아빠를 이렇게 봤어.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네 아빠도 많이 늙었더라고. 우리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그냥 늙어서 돌아가셨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었어. 그런데 막상 네 아버지가 아빠 친구들처럼 그렇게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하니까 우리가 왜 아직도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빠가 짠해. 평생 고생만 했잖아. 엄마랑 아빠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그냥 미워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살고 있어.”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분명 달라져 있었다. 딸이 오면 그동안 서로에게 서운했던 것을 털어놓기 바빴던 엄마, 아빠는 서로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도 멈췄다. 대신 그동안 서로에게 잘해 준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듣기 싫으니까 더 이상 서로에 대한 비난을 내게 하지 말라고 울며 애원했던 나의 부탁 때문이긴 했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를 다정한 눈빛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케이크를 하나 샀다. 올 한 해도 무사히 지나게 된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행복한 내년을 맞이하자는 우리만의 의식이다. 아빠가 대표로 한마디하셔, 하는 나의 말에 아빠가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뗐다.
“우리 가족 모두 특별히 어려운 일 없이 한 해를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 있게 도와주세요.”
우리는 모두 웃었고, 함께 촛불을 껐다.
비록 올해도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더 생겨버렸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건강을 빌고, 내일을 조심스럽게 대하며, 다정한 눈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