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넘쳤고, 통장은 텅 비어갔다
백수가 되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은 진짜 나에게 가까워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최소 20년은 버틸 수 있겠지. 버티는 동안 재테크를 배워가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야. 나는 소비가 많지도 않아. 아껴 쓰면 충분해. 투자해서 더 벌면 더 여유로울 수 있어. 그래 지금 그만두자.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고작 하루짜리 고민이었지만,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지금 내가 소유한 자산으로 은퇴 후의 생활비가 당연히 어느 정도 커버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한 그 생각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살면서 용돈 기입장, 가계부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왜 용돈 기입장을 쓰라고도 안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용돈 기입장을 쓸 만한 용돈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계부 또한 마찬가지다. 뻔한 월급이 그저 월급통장을 스쳐 지나가니 어차피 나의 최대 지출은 나의 월급 수준이었다. 버는 돈 안에서 빚 없이 사는 것이 지난 20여 년의 일상이었기에 특별히 관리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는 나의 소득과 소비에 대한 데이터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예상한 일 년간 필요한 생활비는 당연히 회사에 다닐 때 월급 기준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몇 달 후 통장 잔액을 확인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라?? 한 달에 도대체 얼마를 쓰고 있는 거야?
일 년 치 생활비를 넣어뒀던 통장의 잔고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앞으로 몇 개월을 더 버텨야 하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잔고를 확인하니 삐뽀삐뽀 비상등이 켜졌다. 비상금 통장에서 어쩔 수 없이 생활비를 추가하며 불현듯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백수에게는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차고 넘쳤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매일, 매시간, 매분 나는 돈을 써댈 자유를 얻고야 말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주말 이틀, 집안일에 매진하는 하루를 제외하고는 고작 하루다. 일 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갔지만, 내가 갈 수 있는 최대 일수는 고작 일주일에서 10일이었다.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주말 하루로 한정적이고, 쓸 수 있는 돈은 월급으로 한정됐으니 아무리 돈을 써봐야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백수의 삶이 어디 그런가? 애초부터 기준 자체가 틀려먹었다. 백수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회사원 기준으로 생활비 소진 계획을 세웠으니, 통장 잔액이 나를 기다려 줄 리 없었다.
명품 가방을 산다던가, 좋은 옷과 구두를 사는 일은 없었다.
사치를 해본 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넘치게 많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경험하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마음껏 가졌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기 위한 탐색의 비용은 생각보다 컸다. 이 모든 것이 지출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그룹수업을 들을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개인레슨을 시작했다. 매우 비싸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건강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코로나가 한참이던 나의 백수 일 년 차에는 골프가 유일한 안식처였다. 탁 트인 자연에서의 골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실내에 머물기만 해야 했던 암울한 그 시기를 버티게 했다. 그래도 남는 시간은 백화점 문화센터에 가서 보냈다. 가죽공예도 해보고, 가야금도 배워봤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대단히 무엇인가를 하며 돈을 쓰지 않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취미생활들로 가득 찬 나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다.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곳간은 월급이 사라진 자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매달 수혈되던 월급이 사라지니 통장 잔액은 물 빠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다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결심으로 백수의 길을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채 10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투자가 당연히 성과가 더디게 났다.
앞으로 2년, 3년도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일하지 않으면서도 백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매월 얼마라도 월급처럼 소득이 있을 수 있을까?
미쳐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던 나의 은퇴 후 현금흐름에 대한 고민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