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는 무엇을 싫어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던 터였다.
그저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대로 41년을 살아내고 있던 나는, 나를 들여다볼 시간을 비로소 가질 수 있었다.
잠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알고 보니 8시간을 자야 하는 사람이었다. 7시간은 부족하고 9시간은 많다.
회사를 다닐 때는 1시쯤 잠들어 6시면 일어났다. 고작 5시간을 자고 일을 했으니, 매일 정신이 온전했을 리 없다.
눈이 떠지고 잠에서 깨기까지 최소 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침대에 누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 보면, 지금이면 일어나도 괜찮아하는 신호가 온다. 다정한 신호를 받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니 하루 종일 피곤함이 없이 맑다.
나갈 곳이 없는 백수이지만, 매일 아침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잉여인간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평일은 특히, 매일 오전에 집 밖에 나가려고 애를 쓴다.
일주일에 3번은 필라테스를 가고, 운동이 없는 날은 41층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글을 쓰거나 정리해야 하는 일이 많은 날에는 31층 아지트사무실에 가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일에 집중해보기도 한다.
굳이 애써 하루를 무엇인가로 꽉 채울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정오까지 계획했던 무엇인가를 하고 나서야 이제부터는 잉여인간으로 있어도 괜찮아 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니, 아직도 남아 있는 노예근성인가 싶기도 하다.
주말에는 본가에 내려가는 일정이 아니면 비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청소를 하고 여유를 즐긴다.
하지만 종종 주말에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가기도 한다. 백수가 무슨 주말에 쇼핑이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평일은 대체로 늘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주말이 되면 사람구경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주말 내내 바쁘게,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내 마음도 조금은 바빠지는 것 같아 오히려 좋다.
혼자 있게 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나의 모습은 나는 생각보다 더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대부분의 관계를 끊어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 내내 만난 사람이 나의 오랜 연인 한 명일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나와 관심사가 달라서 만나도 넘치는 기쁨이 없는 관계들을 일부러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됐다. 때때로 외롭기도 하지만 견딜만하다. 얼마 전에는 함께 골프를 치며 몇 년을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들을 만났다. 싱글이라 때도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낸 사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지만, 내 삶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보통의 삶, 출산, 육아, 시댁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들으며, 어쩌면 조금 외롭더라도 혼자 있는 편이 낫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늘 묻는다. 도대체 왜 이리 바쁘냐고.
백수가 되고 나서 루틴이 없었던 첫 해에, 매일 아침 드는 생각은 고역이었다.
오늘은 뭐 하며 시간을 보내지?
놀면 마냥 기쁠 것만 같았지만, 실제로 놀아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내게 주어진 24시간이 보내져야 내일이 오기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취미 생활들이기도 하다.
또, 내가 뭘 해야 즐거운지 알고 싶어 이것저것 시도하느라 시작한 취미 생활들이기도 하다.
가죽공예, 도예(도자기 만들기), 발레, 조금 하다 때려치우고 만 비운의 취미들이다.
두 가지의 공예를 하다 보니 난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데 흥미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음악과 함께 하는 운동이 하고 싶어 도전했던 발레는, 상호 간에 긴밀히 소통하지 않고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억지로 운동을 시키는 시스템을 질려한다는 것만 깨닫고 그만두게 됐다. 예뻐서 사 둔 레오타드들은 안타깝게도 아직도 옷장에 걸려있다.
벌써 4년째 하고 있는 필라테스는 내 몸을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어 더 오래 가지고 가고 싶은 취미이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시작해 아무 동작도 소화할 수 없었던 내가 아주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나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다.
강사자격증을 따 보면 어떻겠느냐는 쌤의 제안에, 집에 와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회복에 집중했고, 그 노력의 결실로 나는 건강한 몸을 갖게 됐다.
영어회화도 벌써 2년이 넘게 순항 중인 취미이다.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일 년 반쯤 보냈고,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로만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의 질문을 통해 평소에 생각해 보지 못한 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느낀다.
최근에는 피아노와 러닝을 시작했다.
시작시점에는 늘 신이 나서 질주하는데, 언제 또 흥미가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스스로 경험해 보기로 한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모든 것을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고,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사라지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내 삶을 채울 수도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어떤지 참는 법, 인내하는 법, 기다리는 법,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을 해보는 것…
이런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인생이 맞을지 아직 알 수 없다.
아직도 내가 어떤 것들을 좋아하게, 어떤 것들을 싫어하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내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봐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언젠가 불편해지만, 또 다르게 살아보면 그만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하루를 살아본다.
그것이 나를 조금 더 아는 길이고, 내가 더 나은 나로 살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