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것을 나만 몰랐던 거야?

엉망진창 달리기 1일 차

by naniverse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다소 엉뚱했다.

나는 마흔다섯이 되어 갑자기 비키니가 다시 입고 싶어졌다.


4년 전 자궁경부암 개복수술로 얻은 긴 수술자국은 여전히 복부에 선명하다. 흉터를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있던 비키니 수영복은 4년 전 이미 버려버렸다. 뜨거운 여름이 되어 수영복을 입을 때마다, 다시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지 못하는 몸을 가졌다는 사실에 나는 종종 우울해졌다.

하지만 유방암 재발로 인한 4번째 수술을 마치고 회복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을 뒤덮은 흉터들. 그까짓 게 뭐라고


영광의 상처도 훈장도 아니었지만, 나마저 외면해 버린다면 너무 안쓰러울 내 상처들

왜 난 이 흉터를 평생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며 살아도 아까운 인생이었다. 수술과 항암치료들을 마치고 겨우 덤으로 얻은 인생이다.


누가 내 흉터를 신경 쓴다고. 그래 더 늦기 전에 비키니 한 번 입어보자.


어떤 비키니를 입어볼까?

온라인사이트를 뒤지고 뒤졌다. 어떤 것이 어울리려나? 적당히 몸매를 가릴 수 있는 그린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스포티한 비키니를 하나 주문했다. 마흔다섯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뭐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여름휴가를 맞아 예약해 둔 수영장펜션에서 한 번 입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흉터가 문제가 아니었잖아?


물이 오를 대로 올라버린 통실한 나의 허리는 도저히 비키니를 소화하지 못했다.

3년이 넘게 필라테스를 하고 있지만, 전혀 정리되지 않은 허리라인이 원망스러웠다.

유산소를 좀 해야 군살이 빠진다던데, 달려보면 이 허리 군살이 좀 빠지려나?


일단 나가서 달려보자.

그렇게 나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25/09/02 - 엉망진창 달리기 1일 차


여름도 거의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뛰기 딱 좋은 계절이 오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어쩐지 시작할 수 없어! 나가자!

제대로 된 러닝복장 따위는 아직 없으니 편한 반바지와 필라테스 때 입는 티를 입고 나섰다. 러닝화도 없으니 일상생활에서 신는 운동화면 충분하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굳은 결심을 해본다.


오늘은 맛보기로 딱 1킬로만 뛰어 보겠어.


사실 소싯적에 10킬로 마라톤을 10번이나 완주해 낸 경험이 있다.

30대 중반 무렵 회사에서 친하게 지나는 분들과 함께 시작했던 달리기였다. 뛰는 것보다는 끝나고 먹는 술과 고기가 너무 좋아 따라갔던 마라톤 대회들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연습을 하고 나간 적은 없었다. 매번 뛰고 나면 무릎이 아파 일주일 씩 걸을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30대의 나는 젊은 혈기로 10킬로쯤은 어렵지만 완주할 수 있었다.


이런 내가 세운 1킬로라는 목표는 뛰기 전까지 꽤나 귀여워 보였다.

그땐 30대였고 지금은 40대이지만, 그래도 그쯤은 쉽게 뛸 것이라고 생각했다.


1~500미터 : 제법 뛸만하다. 호흡이 가빠오지만 그래도 온 만큼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아

600미터 : 갑자기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둔 것 같다. 500미터까지는 분명 괜찮았잖아!!!

고작 100미터를 더 왔을 뿐인데 이렇게 갑자기 힘들다고??

700미터 : 호흡이 너무 가빠온다. 숨 쉬는 게 힘들다. 다리도 너무 무겁다. 멈추고 싶다. 그만 뛸까?

800미터 : 우와 죽을 것 같은데. 도대체 10킬로를 어떻게 뛴 거야 난? 그만할까? 그만? 그만? 어쩌지? 그만?

900미터 : 그만둘 수는 없어. 안돼 딱 100미터만 가면 돼. 진짜 조금만 버텨 힘내. 할 수 있어

1킬로 : 으악! 해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1킬로를 완주하자마자 멈춰 서서 숨을 가삐 몰아쉬었다. 온몸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나이키런 어플을 확인해보니 보니 나는 고작 9분 25초를 뛰었다. 페이스는 9분 20초.

사실 뛰었다고 이야기할 수 조차 없는 페이스인데, 온몸이 땀이 났다. 필라테스 50분으로도 이런 땀은 나 본 적이 없는데


뛴 만큼 걷고 나서나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찾았졌다. 그제야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씩 느껴졌다.

고작 1킬로를 뛰었을 뿐인데, 어쩐지 대단한 일을 해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10킬로를 완주한 것 같은 희열을 어쩐지 맛본 것 같았다.


이 좋은 것을 나만 몰랐어?

호수공원을 뛰던 그 많은 사람들은 이 기분을 매일 느끼고 있었던 거야?



오늘의 러닝 로그

• 거리: 1.01km

• 시간: 9분 25초

• 컨디션: 힘들어 힘들어 엄청 힘들어. 근데 신나!

• 통증: 딱히 없음. 그저 다리만 좀 무거울 뿐

• 다음 목표: 오늘보다 조금만 더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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