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 잘 지내고 있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편지를 써. 나 나를 낳아주신 분을 찾아보고 싶어. 이미 아흔 살이 다 되셨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해. 나를 낳아주신 분이 죽었는지 혹시 아직도 살아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혹시라도 방법이 있다면 찾고 싶어. 천천히 알아봐 주면 고맙겠어.”
20년 만의 한국에 돌아오는 Sue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에 그녀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남편인 브래드와 Sue 둘만 한국을 방문하려던 그녀의 계획이 바뀌어 더 정신이 없던 차였다. 암마의 나라를 다시 가보고 싶은 아들과 딸, 할머니의 나라를 생전 처음 방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손녀딸 둘, 그리고 우리도 빠질 수 없어요. 라고 외치는 사위와 며느리까지, 무려 7명의 미국인이 Sue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8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지낼 숙소를 구하고, 한 달 동안 한국을 여행할 계획을 짜느라 우리는 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에게서 온 메일 한 통은 충격적이었다.
Sue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난 것은 꼭 20년 전이었다. 견디지 못할 만큼 습하고 무더웠던 2004년, 8월 어느 날, 20년 만에 엄마와 딸은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드디어 마주했다. 늘 티셔츠를 즐겨 있던 Sue는 그날만큼은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를 입었다. 청바지 차림의 격식 없는 옷차림을 선호하는 그녀였지만 검은색 무늬가 있는 치마를 차려입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에 대한 예의로 한껏 멋을 부린 상태였다. 하지만 화사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는 다르게 Sue의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툭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연신 얼굴을 들어 천장을 봤다. 그녀의 곁에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울지 말라고 다독이는 9살 카이라가 있었다. 건너편 소파에는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문을 열고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은 Sue의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등에 두 살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를 업고 있는 딸과 함께였다.
“성숙이니?”
“안녕하세요. 유성숙입니다.”
Sue는 오랫동안 연습한 한국말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Sue의 어머니는 20년 만에 만난 딸을 끌어 품에 안았다. 당사자도 지켜보고 있는 우리 모두 누구랄 것 없이 눈물이 흘렀다.
Sue와 어머니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어머니가 세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갔을 때 Sue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엄마였는지 오빠와 남동생만 예뻐하던 냉정한 엄마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어렸고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를 처음 만난 것은 미국으로 입양되고 십 년도 넘게 지나서였다. 다섯 살에 헤어져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만남은 작은고모와 함께였다. 엄마는 고모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연신 미안해요. 고모라고 말했고 고모는 당장이라고 엄마를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또 흘러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된 Sue였다. Sue는 가족 중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영어를 할 수 있는 나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20년 전 만남에서 고모가 어떠한 통역도 해주지 않아 참 많이 답답했다고 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인지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받은 상태였다. 서로 어떻게 지내왔는지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나는 어떤 대화라도 최대한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ue의 어머니는 20년 만에 만난 딸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쫓겨났어요. 애들 고모들이 얼마나 극성이었는지 몰라요.”
“나는 잘못이 없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Sue의 어머니는 40년 전 삼 남매를 두고 떠난 이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Sue의 고모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조금 달랐다. 제 발로 아이들을 두고 나갔다고 했던 고모들의 이야기, 그리고 쫓겨났다고 항변하는 그녀의 이야기. 누군가는 거짓을 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의아했지만 통역을 함에 있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떠한 오해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물셋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Sue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 쫓겨났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우리 집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모들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쫓겨났건 제 발로 나갔던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의 어린아이 셋을 두고 나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오늘 만난 딸은 이역만리 미국 땅으로 입양까지 보내졌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나이 열두 살에 가족에게서 또 버려지고 한국어를 모두 잊은 딸이 안쓰럽지도 않은 모양인지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어떤 이야기가 나뉘었는지 그날의 대화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생각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저런 이야기만 하는 거지? Sue가 상처받을 텐데 어쩌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빠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형수님이 왜 그런 얘기밖에 안 하나 하도 답답해서 나는 호텔방 밖으로 나가버렸어. 성숙이가 너무 불쌍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거든.”
아빠와 Sue의 아버지는 사촌지간이었다. Sue의 어머니는 집을 떠난 후로 자식들을 애써 잊고 살았을 텐데, 잊을 만하면 자식들이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개인정보 보호법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대단히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를 찾고 싶다는 Sue의 말에 아빠는 분명 합법적이지는 않았을 방법으로 늘 그녀의 엄마를 찾아냈고 Sue 앞에 나타나게 했다.
엄마와 딸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0년 전 그때, Sue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어머니에게서 Sue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끝내 Sue는 만남을 거절했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주영, 나는 나의 생모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나를 낳았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그게 다야.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의 엄마인 적이 없어. 나는 내 생모를 찾은 것에 대해 후회해. 다시는 나의 생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평생을 그리워한 엄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많은 밤의 눈물과 함께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엄마를 찾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20년 전 일을 기억하냐며, 엄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하고 묻는 내게 Sue는 이렇게 말했다.
“맞아. 나도 당연히 기억해.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니 미웠던 감정이 많이 사그라들었어. 그땐 나도 고작 40대였으니 참 어렸지. 내 나이가 60이 넘고 나니 용서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싶어. 나를 낳아주신 분은 아마도 돌아가셨겠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라도 알면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돌아가셨다면 산소가 어딘지도 알 수 있으려나? ”
우리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50년도 더 된 입양 서류에서 찾은 ‘김영자’라는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뿐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