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의 쉼, 세 번째 이야기
요즘 저의 인간관계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따금씩 절친한 지기들과 밥 한 끼 하는 것이 전부죠.
항상 많은 사람들 속에 살아왔기에 이런 생활이 적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안합니다.
한창 일을 하던 시절에는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정치나 영업 분야에 종사했다면 그게 맞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시간이 갈수록 아는 사람의 '숫자'보다 '진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직 중인 지금은 그 생각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이 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도망쳤다면 피해라도 적었을 텐데, 문제가 생기면 끝까지 해결하려는 성미 탓에 더 큰 상처를 입었죠. 매일 밤, 기도 시간이 되면 분노와 원망이 랩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패대기를 쳐도 시원치 않을 난관은, 희한하게도 매번 선물을 남깁니다.
이번에는 그 선물이 인간관계였습니다.
친구는 어려울 때 알 수 있다는 옛말처럼, 상황이 나빠지자 인간관계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이제는 놓아줘야 할 사람, 평소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앞으로 더 가까이해야 할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인간관계의 정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는 가족과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와 새로운 자극을 주는 후배 정도만 있으면 충분히 삶을 풍요롭게 채울 수 있습니다.
수많은 여인의 사랑이 필요했던 카사노바 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제대로 된 한 명의 인연만 있어도 족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고, 돈벌이를 시작하고, 새로운 가정을 일구게 되면서 우리는 점점 인간관계의 부피를 키우게 됩니다. 휴대폰 메신저의 친구 목록은 갈수록 길어지고, 명절마다 챙겨야 할 사람은 늘어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박 OO이라고 합니다.
친구 목록에 있는데 제가 모르는 분이라...
혹시 누구신가요?
심지어 얼마 전에는 이런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죄송하지만 제가 모르는 분인 것 같습니다.
목록에서 삭제 부탁 드립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몹시 어색한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저희는 서로의 친구 목록에서 사라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카페 쿠폰과 함께, 선배님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좋은 날이 올 거야.
더 챙겨줘야 하는데 미안하네.
아이랑 산책하다가 시원한 거라도 마셔.
타지에 발령을 가시는 바람에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새로운 곳에 적응하시면서도 제 생각을 해주시고 아이까지 챙겨주시는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쉬는 동안 저는 이렇게 인간관계 속 허수와 상수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입체적이고 유동적이라, 무 자르듯 함께 할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를 가르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간관계에도 살피고 걸러 중요한 것만 남기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관계로 인한 피로와 상처가 줄어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정을 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대한 기준을 필요성이나 활용성에 두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장은 내게 필요한 사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하실 수 있으나 계산으로 시작된 관계는 계산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 마음에서 출발하여 마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관계를 조건보다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관계는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하고 떠올릴 때 마음이 미소 짓는 관계입니다.
때로는 순간적인 감정에 끌려 잘못된 관계를 맺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모른 척할 뿐이죠. 인간관계를 통해 진정한 쉼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보내는 미약한 신호를 포착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정제하는 것은 결국 마음을 지키고 쉼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편한 사람 곁에서 온전히 쉴 수 있는 내일을 꿈꾸며, 오늘은 친구 목록을 살펴보시고 마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