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의 쉼, 네 번째 이야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하늘에 삽니다.
누구보다 가까웠고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한 권의 일기뿐입니다. 그 속에는 저희가 나눈 우정의 기억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저에게는 또 다른 소중한 친구들이 생겼지만, 아직까지도 삶이 버거운 날이면 그녀를 찾곤 합니다. 벌써 스물여섯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는 제 안에 존재합니다.
가끔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가 그녀를 잊지 않았듯 요 녀석도 오랫동안 나를 기억하겠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겨지는 또 다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제의 쉼을 마무리 지으며, 유언장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았습니다. 대학 진학이나 회사 입사, 출산 같은 주요 사건이 먼저 생각날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아주 사소한 기억부터 떠올랐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만들어주셨던 임연수구이.
하교 길에 나를 쫓아오던 강아지.
밤마다 동생에게 들려주던 이야기.
첫 데이트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고사리손으로 그려 준 생일 카드.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순간들이 계속 튀어나왔습니다. 방금 보던 책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 온 집안을 헤매는 제가, 열 살 때 보았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오프닝 송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른다는 게 어이가 없었습니다.
작은 삶의 조각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이어 붙이고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코 순탄하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매 순간 가치 있는 일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정겨운 시절을 추억하며 미소를 짓고, 난관을 극복한 경험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후회나 아쉬움이 남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다가올 삶의 모습도 다시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먼 훗날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쓰기 시작한 유언장은, 저를 위한 정제의 도구로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때로 삶은 잔인할 만큼 힘이 듭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예상치 못한 사고가 닥치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럴 때면 유언장을 한 번 써보시기를 권합니다.
죽음이라는 최종 관문 앞에 미리 서보면 생각보다 모든 상황이 명징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희미했던 삶의 윤곽이 또렷해지고 감춰두었던 진짜 감정과 욕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에서 무엇이 진짜 소중한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목록으로 만들 정도의 재산이나 대대손손 자랑하고 싶은 업적은 없지만 저의 유언장은 벌써 두 장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이가 유난히 좋아하는 반찬의 요리법부터 얼굴도 보지 못한 미래의 사위에게 건네는 당부까지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유언장을 쓰며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엄마들의 잔소리가 갈수록 많아지는 건 숙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언장을 미리 쓰며, 지난 삶을 툭툭 털어내고 다가올 삶을 기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하늘이 정한 때가 다가왔을 때
세상의 소풍이 아름다웠노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