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의 쉼, 두 번째 이야기
연봉이 적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에서 스무 해를 쉬지 않고 일했거든요.
그래봤자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스텔라 장의 노래처럼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었지만 그래도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월급이 뚝-하고 끊겼습니다. '앞으로 무슨 돈으로 먹고살지?"라는 생각에 며칠 밤을 뒤척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휴직이었다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불시에 닥친 일이었기에 막막함은 더욱 컸습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비상금으로 갖고 있던 현금을 세어 보았습니다. 옷장 속에 잠들어 있던 명품 가방을 팔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돼지저금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500원짜리를 먹는 아빠 돼지, 100원짜리를 먹는 엄마 돼지, 그 외 동전들을 먹는 아기 돼지. 아이와 함께 기른 돼지들이 제법 무거워져 있었습니다.
오늘, 돼지 잡자!
아이를 설득해 돼지저금통을 갈랐습니다. 합산해 보니 총 126,510원. 저금통치고 적지 않은 금액에 신이 나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동전을 세어 통장에 입금하고 돌아오는 길,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이제 돈 없는 거야? 우리 집에서 못 사는 거야?"
머리를 돌로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축해 둔 돈도 아직 남았는데 휴직 한 번 했다고 돼지까지 잡으며 아이를 불안하게 한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밤, 돈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돈은 비루한 민낯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저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무기가 있었습니다.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양 극단을 오가며 현란한 인생그래프를 그려온 저는, 돈의 본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돈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 많이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돈에게 말했습니다.
이십 년 간 열과 성을 다해 채워 주었으니 이제는 나도 생각 좀 해야겠다고.
계좌에 찍힌 숫자들은 잠시 잊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쥐콩만한 미모가 살아있던 시절, 호화로운 삶을 약속했던 부잣집 아들의 청혼을 뿌리쳤던 저를 보았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계속 일하고 싶어 연봉 상승이 보장된 이직 제의를 거절했던 저도 찾았습니다.
솔직히 약간은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적어도 제 인생 최고의 우선순위는 돈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적은 돈으로도 삶을 알차게 꾸렸던 젊은 시절의 저도 발견했습니다. 냉장고 속 남은 재료들로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고, 십 년도 넘게 입은 원피스를 유행에 맞게 연출하고, 단돈 만원으로 문화생활을 즐기는 요령은 아마 그때 배운 것이겠죠.
예전의 경험들을 활용하면 생활비가 줄어도 제법 잘 버텨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사실 저는 돈에 초연하거나 달관한 사람은 아닙니다. 더 큰 집과 더 비싼 차를 가지고 싶고 제 아이는 저보다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은, 아주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돈과 대화하는 시간들을 통해, 제가 그리 많은 돈이 아니어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새벽 1시 14분.
지금 저는 지난달 카드명세서를 보며 더 줄일 수 있는 비용을 골라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모아 둔 돈은 바닥을 보이고 있고, 몇 달 후 복귀해야 할 직장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여러모로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마음은 생각보다 고요합니다.
이는 아마도 돈과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제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겠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염원을 토대로 삶의 우선순위를 나열하고 그에 따라 꼭 필요한 돈을 꼼꼼히 따져 보는 시간. 어떠한 목적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어떤 생각과 태도로 그 돈을 써야 할지 고민하고 계획하는 시간.
이 시간들이 재테크에 취약하고 이문에 어두운 제가 돈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엄마가 있어서 너무 좋아. 초밥 안 먹어도 되니까 엄마가 일하러 안 갔으면 좋겠어."
요즘 아이는 매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를 보는 저도 행복합니다. 계좌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그만큼 우리의 행복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몇 달 안돼 저는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하겠죠.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면 돈이 꼭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시간만큼은 돈보다 사랑을 우위에 두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외식을 한 달에 한 번 하고, 매년 가던 해외여행을 무기한 연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행복하니 그걸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적은 금액이라도 꾸준히 쌓이기만 하는 착실한 통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현실 속 돈은 종잡을 수 없는 연인에 가깝죠. 채워졌다 싶으면 비워지고, 비워졌다 싶으면 채워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돈과의 관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충분히 대화를 나누는 것뿐입니다.
오늘 하루, 돼지저금통을 성급하게 갈랐던 저처럼 돈의 양에만 집중하지 말고, 돈과의 관계를 돌아봤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기준으로 돈을 정제하고 진정한 경제적 쉼을 맛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