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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품

회복의 쉼, 네 번째 이야기

by 난주

나비가 첫 비행 전 날개를 말리는 시간.


저에게도 그 시간이 꼭 필요했습니다.

쉼의 여정을 시작하며, 소진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 했습니다.


가사 명상을 통해 복잡했던 머리를 비우고, 스마트폰을 끄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정성을 담은 집밥으로 몸과 마음의 기운도 북돋았습니다.


이제 회복의 마지막 과정으로 숙면을 이야기하고 다음 쉼의 여정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작년 봄부터 저는 불면에 시달렸습니다.


잠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간신히 잠이 들어도 한밤중에 깨어나기 일쑤였습니다. 한 번 일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해 애를 먹었고, 악몽에 시달리며 끙끙대는 날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신호를 기다리는데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습니다. 1분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신호가 바뀌었는데 차는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경적 소리에 놀라 얼른 액셀을 밟았지만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내과를 방문해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습니다. 일주일쯤 약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복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이 몽롱하고 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역시 이런 약을 오래 먹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 더는 병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숙면에 좋다는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해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불면의 근본적인 원인은 직장에 있었기에 휴직하면 자연스레 치유가 될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근을 하지 않아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불면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은 숙면하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다시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순간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아이

옆에서 뒤척여도 꿈쩍도 않는 아이

열 시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는 아이


아이를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날부터 아이가 숙면을 취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비결을 분석했습니다.



낮 시간 동안 아이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순하고 차분한 편이라 앉아있는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시간 외에는 멈춰 있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작은 몸 안에 100만 볼트 모터라도 숨긴 듯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저까지 숨이 차는 기분이었습니다.


간식 시간에는 그날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급식에 나온 연어조림이 맛있었다며 입맛을 다시고, 친구가 들려줬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쪽지 시험에서 실수로 문제를 틀렸다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감정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그 모습이 참 건강해 보였습니다.


밤이 되면 제 품에 안겨 깊이 잠들었습니다.

엄마 냄새가 가장 좋다며 가슴팍에 파고드는 작은 어깨를 꼭 감싸 안고 나직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꼭 감았습니다.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은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습니다.


아이의 숙면 비결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시간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본연의 생체 리듬에 따라, 해가 뜨면 에너지를 발산했고 해가 지면 활동을 중단하고 잠에만 집중했습니다.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가감 없이 전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저 없이 몸과 마음을 기댔습니다.


저는 아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햇빛을 받으며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에너지가 있으면 영상을 틀고 열심히 운동을 따라 했습니다.


직장에 대한 원망과 분노, 경력과 생계에 대한 걱정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아이처럼 엄마에게 조잘거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로한 부모님을 걱정시킬 순 없었기에 절친한 지기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그러고도 남은 감정은 일기와 기도를 통해 스스로 흘려보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다른 생각과 행동은 모두 멈추고 아이와 제 자신을 보듬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스마트폰은 멀찍이 밀쳐 두고 머리맡에 쌓여있던 책들도 거실 테이블로 옮겨 놓았습니다. 품에서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면 제 자신을 꼭 안고 괜찮다, 잘하고 있다, 사랑한다 속삭여 주었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마음을 다독이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때가 잔뜩 묻은 어른들은 이마저도 자신의 기준으로 각색하여 복잡하게 꼬아 버리곤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활동하고 밤에는 잠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쓸데없이 숙면에 좋다는 식품과 용품을 구입하고 맞지도 않는 습관을 억지로 들이느라 정작 본질은 놓치고 있었습니다.


잠은 기를 쓰고 해결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제가 아니라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분주한 일상으로 소진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기운을 불어넣고,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어제 대신 깔끔하게 다려진 내일을 꺼내놓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날이 갈수록 감소 중인 수면 호르몬과 여전히 버퍼링에 걸린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수면 시간은 예전보다 조금 줄었지만 그래도 저는 요즘 제법 잘 자고 있습니다. 중간에 깰 때도 있고 악몽을 꿀 때도 있지만 저를 다시 한번 안아주며 잠과의 관계를 회복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잠만큼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오늘 밤, 인위적인 수면 습관은 모두 잊고 어머니의 자장가에 자연스레 잠이 들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포근한 밤의 품에 온전히 기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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