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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Jan 25. 2022

붕어빵을 신고하다

작고 여린 것들의 고난 두 번째 이야기

붕어빵 아시죠?


붕어빵, 군고구마, 군밤, 호떡, 찹쌀떡, 요즘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겨울 길거리 간식이다. 원자재 값 상승으로 수지 타산이 안 맞고 다양한 간식거리에 밀려 찾는 이도 점차 줄어들었다고 한다. 머지않아 한여름에 붕어빵을 찾는 임신부 아내를 위한 '붕어빵 파는 곳을 찾습니다!'와 같은 예비 아빠의 절박한 수소문은 곧 사라질 풍경일까.


한국인치고 붕어빵에 오버랩되는 기억 없는 사람이 있을까. 붕어빵의 출현으로 겨울을 실감하고 붕어빵의 가격으로 물가를 체감한다. 붕어빵을 먹으며 우정을 쌓고 붕어빵을 포장하며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한다. 사람의 체온을 닮아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는 붕어빵의 단맛은 가장 익숙하고 친근하다. 아저씨 아줌마의 재빠른 솜씨에 따라 위아래로 뒤집어지는 붕어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잡념이 사라지던 기억은 다들 있다. 아이가 부모를 쏙 빼닮으면 붕어빵 모녀, 붕어빵 부자라고 하니 언어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붕어빵을 어디부터 먹느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심리테스트는 안 해 본 사람 있을까. 붕어빵에 붕어가 있네 없네 하는 말장난도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해한다. 이쯤 되면 붕어빵은 한국인에게 기념비적 문화 현상이다.


이렇게 내가 꼭 좋아하는 간식이 아니더라도 생각만 해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이 소박한 간식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오죽하면 붕어빵을 살 수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붕세권'이라는 새말이 생기고 웬만한 사람들은 이 단어를 이해한다. 거기에 이 붕세권을 알려주는 어플까지 만들어지면서 다운로드 수가 40만 건이 넘는다고 하니 이것들이 아직 우리 옆에 존재해 주어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붕어빵을 신고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접속한 지역 커뮤니티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자재를 정리하고 천막으로 똘똘 묶은 빈 붕어빵 리어카가 지나가는데 거기에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SNS나 맘 카페에 올리지 말아 달라고, 신고당한다고 하는 투박한 글씨가 종이에 쓰여 있더랬다. 글쓴이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 세상 너무 팍팍하다, 붕어빵 좀 팔게 둔다고 본인 가게 망하는 거냐 성토했다. 조금만 너그러워지자고 했다.


맘 카페에 올라온 사진(*촬영자의 허락을 얻어 사용합니다)


일단 놀라웠다. 정의로움을 사랑하는 민족, 한국인의 신고 정신이 얼마나 투철한지는 잘 알고 있다. 나도 좌회전을 조금, 정말 조금 먼저 하느라 도로 위의 주정차 금지 구역에 한 발(바퀴)을 들여놓았던 어느 날의 일에 대해 여지없이 신고 DNA를 품은 어떤 한국인에게 블랙박스 신고를 당하고 범칙금 6만원을 내며 그의 정신에 경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여튼 대부분 작고 여린 것들이 크고 강한 것들을 신고하는 게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신고 DNA 아니던가. 우리의 신고 정신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약자의 보행을 가로막는 불법 주정차, 선량한 운전자의 교통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호위반 등이 아니던가.


댓글은 둘로 나뉘었다. 예전의 따뜻한 정은 다 사라지는 거냐, 길어야 겨울 세 달인데 그걸 못하게 신고하고 좋은 꼴 보겠느냐, 근근이 살아가는 노점까지 못 살게 구는 사람은 복이 달아날 거다, 대부분이 이 일을 안타깝게 여겼다. 대체로 노점상을 사회적 약자로 인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다른 생각들도 있었다. 세금 내고 월세 내며 장사하는 입장에선 충분이 이해가 된다, 노점이라고 다 영세하지 않으며 월급쟁이보다 훨씬 많이 버는 사람도 많으니 걱정할 게 아니다와 같은 의견이 눈에 띄었다. 일부 부를 축적한 노점상을 겨냥하는 입장이다.




결국 잠시 동안의 소란과 함께 저마다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양쪽 입장 다 들어봐야 안다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건 좀 아니었다. 내 마음은 그날 밤까지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잠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어려워 동동거리는 추위 속에서 붕어빵을 파는 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신고자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붕어빵 장사가 TV에 나올 법한 은밀한 신흥 갑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한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붕어빵 노점상이 영업을 못하게 되었을 때 엄청난 반사 이익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고를 한 사람을 생각하니 역겨웠다. 자기도 퇴근길에 가족을 생각하며 붕어빵을 포장하면 좀 안 되는지, 자기네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꼭 그 붕어빵 때문이 아닐 텐데 신고 정신을 발휘한 그 누군가의 화풀이 중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매출 좀 오르면 정말 마음껏 웃을 수 있는가. 결국 죽일 놈은 밥벌이의 지겨움인가. 그런데 그 사업주가 나라면? 이렇게 한가롭게 가정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있나?


우리라는 애처로운 동질감


어떤 집단이 이해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 나는 그 갈등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갈등을 초래한 상황적 요인이 무엇인가를 보려고 한다. 가령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동일 사업장의 편의점이 생겨 두 점주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그렇게 만든 사업장의 법적 규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자꾸 조는 학생들이 늘어난다면 그 학생의 문제뿐만 아니라 휴식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아닌지, 학습 공간의 환경에는 문제가 없는지를 보려고 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장점은 갈등이라는 감정적 문제에 몰입하지 않고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쪽으로 궁리하게 된다는 것. 그러다 보면 다시 우리는 작고 여린 존재일 뿐이라는 애처로운 동질감이 바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


붕어빵 논란도 마찬가지다. 신고한 사람과 신고당한 사람의 문제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시국을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나 본질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발버둥 치고 있다. 신고자가 노점상을 내 이익을 침해하는 존재가 아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애처로운 동질적 존재로 인식하게 될 때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지금 터널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을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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