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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Feb 15. 2022

성적 침범이 지닌 네 개의 칼날 1

첫 번째 이야기

비정상적인 일 앞에서,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보고 떠올렸다. 그 비정상적인 생각들이 그녀 자신을 향한 두 번째 칼날이었음도.


첫 번째 칼날_ 회식, 술, 노래방, 취한 인간, 그 옆의 작고 여린 것


3월 1일 자 정기 발령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곳에서 2월은 참으로 뒤숭숭한 시간이다. 떠나는 자의 두려움과 남는 자의 익숙한 한숨이 한데 모인다. 그렇게 같아 보이면서도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처럼 왠지 이질적인 시간이 바로 2월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코로나-19는 대한민국의 참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대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환송회가 있다. 수년 전의 그날도 환송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영전을 앞둔 관리자를 떠나보내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떠들썩한 식사가 끝나고 응당 노래방으로 향하는 이른바 2차는 당시에 매우 관례적인 모습이었다. 경력이 10년이 넘어가는 그때에도 나는 회식 중간에 도망 나오는 것에 영 익숙지 않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친한 K가 친목회의 총무를 맡았기에 그녀를 혼자 두고 집으로 가기 미안한 마음에 적당히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회식 분위기 속에서도 노래방 문 앞까지만이라도 갔다 귀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노래방 문 앞에서 혼자 술독에 빠져 있다 나온 듯한 S선생을 만났다. 나와 눈이 마주친 S선생은 갑자기 아묻따 내 멱살을 잡았다.      


그때까지 그에 대한 내 평가는 ‘유머러스하고 일 잘하는 선생’이었다. 그는 업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 데다 타고난 일머리가 좋고 언변이 재치 있으며 교과 분야에서도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는 네 살 위의 대학 동문이었다. 이곳에 발령을 받고 몇 번 같은 업무도 맡아 친분이 쌓일 법도 했지만 나이 차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의 언행은 가끔 권위적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어 가까이하기 힘들었다. 왠지 모를 거리감으로 사적으로는 차 한번 마신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직장에서 일로 만난 사이에 불과한 서로에게 별다른 나쁜 감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양손으로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던 것이다.

때는 8월 말이었고, 아직 옷이 얇았던 계절이었고, 나는 칼라가 넓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서 멱살을 잡히기 딱 좋았던 복장이었고, 멱살을 잡혔을 때의 신체 접촉으로 인한 불쾌감을 느끼기 더없이 좋은 복장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했을 듯이, 나는 일단 말장난으로 위기를 넘겨 보고자 했다.     


- 아 이거 왜 이러세요? 제가 남동생으로 보이세요?

(워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뭐 대략 이런 류의 말이었던 것 같다.)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나의 반항에 곧바로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이 손을 풀었다. 그리고 노래방 문을 힘겹게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썩 유쾌하지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는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두 번째 칼날_ 비정상으로 인한 정상인의 비정상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잠이 들어 있었던 걸까?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고, 발신인이 K라는 걸 보고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 여보세요, 언니(우리는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불렀다), 저 성추행당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미친 놈이. 제 가슴을 만졌어요.   


K는 말을 잇지 못해 울먹이고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 있었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노래방 안에 들어가 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지켜보며 리모컨으로 예약 번호를 눌러주고 하는 따위의 잡스러운 일을 하고 있던 친목회 총무는 머릿속으로 잠시 후에 지불할 노래방 비용에 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K 옆에 S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고 했다. 술은 조금 마셨지만 취하지는 않았던 K는 S선생과 대화를 시작했다고 했다. 대화의 주제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S선생에게 K는 자기도 운동이 너무 필요한 상황이라며 시덥잖은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했다.


그러자 S선생은 처음엔 자신의 몸을 만지며 근육 자랑을 했다고 했다. 맞아요, 저도 근육이 너무 없어서 운동을 해야 해요, 라는 말을 하는 K의 어깨와 팔을 만지며 S선생은 너에게 근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했다. 시끄럽고 어둡고 반짝이는 조명이 산란하게 돌아가는 그 방 안에서, 그리고 S선생은 갑자기 그 손을 옮겨 가 K의 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했다. K는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말문이 막혔다. 이 일을 어쩌지.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 목격자 있어? 그 안에 누가 있었어?     


- 사람들은 여러 명 있었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가 봤는지 확인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근데 취해서 기억 안 난다고 할까 봐 그래서 제가 바로 전화 걸어서 통화 녹음했어요. 제 가슴 만진 거 기억나냐고, 왜 그랬냐고 따졌더니 기억난다고 미안하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한 거 다 녹음해 놨어요.     


- 잘했어. 진짜 잘했다. 잘했어. 그거 잘 보관하고 신고하자.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선배고 언니었기에 너무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다시 되돌아 가도 나는 그 이상의 어떤 위로도 냉정한 대응책도 이야기해주지 못했을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어떤 말을 했으면 좋았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내겐 사치스러웠다.



다음 날 K는 주차장에 도착하고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결국 본인의 연구실로 가지 못하고 우리에게 와서 울먹였다.


- 앞에 그 인간이 있을까 봐 못 가겠어요. 저한테 염산이라도 뿌리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되는 것이었을까. 비정상적인 일 앞에서,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보고 떠올렸다. 그 비정상적인 생각들이 그녀 자신을 향한 두 번째 칼날이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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