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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Jul 13. 2021

로봇청소기와 나는 닮았다

한 지구인의 로봇청소기 시운전기

집안일에 소질도 없거니와 그 집안일을 하는 사람치고 가전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다.


요즘 집들에는 다 있다는 식기세척기, 건조기, 의류관리기 같은 대형 가전에서부터 작지만 야무지게 그 기능을 뽐낸다며 동료와 블로그들마다 강력 추천하는 미니 오븐, 정수기, 핸디형 스팀다리미, 블렌더, 커피 머신 등이 우리 집엔 없다.(이렇게 쓰고 보니 사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욕구가 없는 건 아닌 듯하다. 누군가 에그 쿠커가 그렇게 편하고 좋다고 하면 난 계란을 좋아하니까 하며 사고 싶어지고, 누군가 미니 오븐 하나 있으면 생선구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는 메뉴가 된다고 하면 그동안의 요리 스트레스는 다 생선구이 때문이었던 양 그것이 사고 싶어진다.

 

사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야 할 이유로 따지면 안 살 이유가 없는 것들뿐이어서 한번 시작하면 갖춰놔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가뜩이나 좁은 주방을 소형 가전 전시장으로 만들어버릴까 솔직히 겁이 난다. 그리고 그건 지구를 위한 좋은 선택이 결코 아니다. 결혼 살림 품목에 당연히 끼어 있던 15년 된 전자레인지, 한 번 리뉴얼한 전기밥솥과 포트와 토스터, 숙고 끝에 사는 게 더 낫다고 판단된 8년 된 에어프라이어 정도가 우리 집 주방의 소형 가전인 상황이다.


그런 내가 사고 싶은 가전이 있었다. 제목에 이미 스포일러가 있으니 빠르게 밝혀 보면 그것은 로봇청소기다. 로봇청소기가 사고 싶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 쓰고 있는 무선 청소기가 너무나 무겁다. 선천적으로 손목이 가늘고 약한 내게 드라마 속 부잣집 거실엔 꼭 있는 거치형 무선 청소기는 빛 좋은 개살구다. 집안이 더러운 건 순전히 무거운 청소기 탓이다.
이 로봇청소기에는 물걸레질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그리고 장마철이 다가온다. 한여름에도 보송보송한 거실 바닥과 방바닥을 느껴보고 싶다. 바닥 물걸레질을 언제 했는가는 밝히지 않겠다.
 '레고는 고양이'의 주인공 레고의 털 빠짐이 어마어마하다. 사람 집에 고양이가 사는 건지, 고양이 집에 사람이 사는 건지 헷갈리며 못 먹어도 하루 50가닥은 내 뱃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이 상황에서 가구 밑까지 들어가 먼지를 쏙쏙 흡수할 로봇청소기는 구원투수, 아니 진정한 구원자가 될 것이다.


고민은 길지만 결단을 내리는 것에는 빠른 편인 나는 마켓의 핫딜을 활용해 드디어 로봇청소기를 들인다.


꿈에 부풀어 언박싱을 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답게 오직 청소만을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고, 우주의 기운을 모아 충전을 하고, 드디어 시운전에 들어간다. 이 로봇청소기는 도도하고 침착하게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숙련된 가사노동자처럼 믿음직스럽게 집안 상황을 파악한다. 그것은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른바 향후 청소의 기본이 되는 집안 지도 그리기, '맵핑'이었다. 나는 아이의 첫걸음마를 바라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또는 국가대표 마라토너의 레이스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 움직임을 면면히 살핀다. 이 맵핑에는 집안의 모습을 설계도에 가깝게 정확히 인식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더러운 곳을 집중적으로 청소해 주는 스팟 청소 기능, 카펫이 깔려 있어 물걸레질을 해서는 안 되는 구역이나 청소기가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구석 등을 지정해서 진입을 금지시키는 가상 장벽 설정 기능 등 놀라운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다. 구석에 들어가 다소 억울하다는 듯이 공회전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서로 알아가는 사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설레는 갈등에 불과했다. 로봇청소기와 나는 오늘부터 1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그의 동선을 지켜보다 보니 묘하게 아주 익숙한 무언가가 떠오른다. 다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떨떠름한 기분인데, 그 무언가가 바로 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사람과 부딪히다 퇴근하는 날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A의 십여 초도 되지 않는 짧지만 날카로운 말이 천천히 열리고 닫히는 그 문처럼 의뭉스러웁게 내 심장에 깊이 스며드는 날이 있다. 또는 이 말을 B에게 꺼내는 순간의 시원함은 잠시이고 결국 약점을 잡히는 건 나임을 분명히 느끼면서 결국 그 말을 꺼내고야 마는 날이 있다. 순간의 배설감과 정의 구현은 채 3분도 되지 않지만 뒷감당의 자괴감은 3개월은 걸릴 것임을 분명히 인지함과 동시에 그 말을 마침내 해버리고 말게 되는 날이 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여기저기 무의미한 충격파를 온몸에 흡수하고 퇴근한 날이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청소기를 돌려 본다. 일말의 서두름도 없는 차분한 걸음으로 몸에 밴 직진과 좌우회전을 반복하며 ㄹ자 모양으로 방바닥을 훑는 그를 보면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만 쉬고 싶은 내 마음을 보는 듯 상념이 시작된다. 익숙한 공간임에도 주변과의 부딪힘과 꺾임은 로봇청소기의 숙명이다. 어제의 늘 그런 막다른 벽과 각진 곳, 오늘의 갑작스러운 장애물들로 인해 약속된 ㄹ자의 움직임은 그 부딪힘과 꺾임 속에서 언제나 조금씩 수정되고 변형된다. 어제도 부딪혀 보았던 그 벽에 여전히 수차례 온몸을 들이대고, 갑작스러운 물체이긴 하지만 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대단치도 않은 장애물에 갈 곳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야 마는 로봇청소기가 답답하기 그지없다. 충격 방지를 위한 틈과 충격 흡수를 위한 스프링 장치가 로봇청소기의 겉면에 설계되어 있지만 언젠가 그도 닳아 없어질 것이고 그 내밀한 상처는 켜켜이 쌓이고 있을 것이다.


진입금지를 위한 가상 장벽도 무용지물일 때가 있다. 굳이 청소할 필요가 없거나 진입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 가지 말 것을 설정해 놓았지만 순간적 오류인지 기계적 한계인지 가끔은 그 주변을 계속 서성이며 심한 내적 갈등을 보여 준다. '가지 말라고!' 그 외침에 닿기도 전에 한 발짝을 뗀 로봇청소기는 몇 번이고 그 문턱들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애쓰다 결국 멈춰버린다. 그리고 내가 가서 들어 올리기 전까지는 회복이 불가하다. 그것이 로봇청소기의 못난 모습이다.

대체 왜 저러고 있어, 또 저러네, 하다 보면 그게 딱 오늘의 나라서 쓴웃음이 난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일 A와 B를 다시 만나면 나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여자 지구인을 청소노동에서 (약간은) 해방시켜 준,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와 닮아 있어 정이 가는 로봇청소기처럼 진입금지, 가상 장벽을 만들어놓아야 할 것 같다. 내 안의 충격 방지용 스프링은 소중하니까. 아직 한참을 더 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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