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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Feb 22. 2022

성적 침범이 지닌 네 개의 칼날 3

세 번째, 마지막 이야기

어떤 고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사랑한다.


네 번째 칼날_ 시시때때로 소환되는 무심한 언어들


공황발작 이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사건에 대한 소식에 거리를 두고 전해 듣게 되었다. 나를 진찰한 정신건강의학과 담당의피해자에 대한 극도의 감정이입을 한 원인으로 지목했고 내게 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자극적인 사건들을 되도록 멀리할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 이 사건을 맡은 담당자의 말을 전해 들은 바로는, 명확한 피해 진술이 있음에도 양측의 입장이 일치되지 않는 사건이어서 사건 담당자는 평소 두 사람 사이의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S선생은 CCTV도 없던 그 방 안에서의 일을 끝까지 발뺌했던 모양이다. 형, 저는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같이 그를 둘러싼 어긋난 응원들은 그에게 나쁜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고 정황적 증거가 있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던 녹음 파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죄는 있되 죄를 묻기는 어려운 상태를 의미하는 기소 유예 처분이 내려졌고, 직위 해제 상태였던 그는 복직하여 다른 학교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것으로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라면 참 덜 나빴을 텐데, 벌써 년이 지나가는 일인데도 그 일은 가끔 우리를 다시 과거로 돌려보내고 있다.      


선배 언니는 출장 간 곳에서 우리 학교의 소문을 묻는 타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곤욕을 치렀다. 거기 여교사들이 피해자를 꼬셔서 신고하게 했다면서? 뭐? 그게 너라고? 엄청 드센 여자들이라는데 그게 설마 너였다고? 우리 중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그 많은 화살과 삿된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던 언니는 그 후로도 한참을 괴로워했다.      



그리고 20□□ 년, S선생은 자기 집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장례식장에서 우리 학교의 한 남 교사는 ○○학교 여 선생들은 모두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우리를 향한 거칠고 차가운 비명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부고가 뜨고 K는 다음 날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했던 다음 해에 예정된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고, 생각보다 밝게 잘 지내서 결국 피해자는 우리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잘 지내주었던 K였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S선생이 어쩌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기도 했다.


 세상은 좁고 소문은 빠르다. 선배 언니의 지인인 한 경찰관은 S선생의 음주운전 적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한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 벌어진 그의 불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몹시도 안타깝고 애달픈 인생이었다.      


그 후에 듣게 된 그의 부고는 우리를 다시 20■■년의 날들로 강제 소환했다. 우리는 마치 20■■년의 그 차갑던 태도의 사람들 앞에 불려 나와 뭇시선을 온몸으로 따갑게 감당해내는 기분이 되었다. S선생의 소식은 사람들의 감정을 또 한 번 불필요하게 고조시켰다. 우리는 사람들이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캐물어 결국 성추행 고발 사건의 주변인인 우리를 지목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피를 말리는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언니가 말했다. 이거 언제 끝나? 이 사건의 피해자는 도대체 누구지?    

  



후일담_ 용서 그리고 용서     


우리는 누구나 크든 작든 삶의 관문마다 용서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호기롭게 용서를 베푸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고 오직 그 한 마디가 떨어지길 간절히 기다리는 무릎 꿇은 자가 될 수도 있다. 누가 더 운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언제부턴가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급해졌다. 그 단어만 떠오르면 내가 아무리 지독한 피해자여도 꼭 해야만 하는 숙제를 밀린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을 미처 돌아보지 않은 너무 빠른 용서는 필요한 불편함에 대한 포기이다. 자기 마음에 대한 방관이다. 나는 분명 이 사건의 제2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한다. 작고 여린 것과 함께 하기에 겪어야 하는 고난, 나는 분명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랬기에 나는 더욱더 용서를 하고 싶었다.     


제발 내게 와서 미안하다고 말해줘, 나는 용서하고 싶어. 내가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는 강물에 몸을 싣고 여기까지 왔듯이, 당신들이 어쩌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어.      


그러나 아무도 내게 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S선생도 죽음으로 이를 회피했고, 그 주변인들은 애당초 접촉을 서로 피했으니까.


그런데 피해 당사자인 K는 학교를 옮기는 날 S선생의 절친으로 탄원서를 주도했던 한 선생으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많이 미안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내가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닌데 나는 무척 반갑게 그 소식을 들었고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듯했다. 그렇다. 그도 그 사건 이후로 얼굴을 잘 볼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어쩌면 이 사건의 피해자였을 테니까.


그러나 목의 가시처럼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의 과정에서 동분서주하면서 S선생의 절친한 후배 Y를 찾아갔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Y와는 이 답답한 상황을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반갑지 않았을 나에게, Y는 그래도 함께 대화를 이어나가 주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 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형이 어쩌면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측근 중 유일하게 우리의 입장에 동조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사건이 있기 전 S선생의 길고 긴 방황을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주었던 후배다. S선생의 가정사, 병력(病歷), 사건이 있던 당시의 그의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던 후배다.      


나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엄청난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기나긴 투쟁의 시간 동안 때로 나는 현실 감각이 무디어지면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이 실제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신경과적 이인증과도 같은 시간을 몇 차례 마주한 적이 있었다.      


내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 거센 돌풍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등질 수 있는 행운이 있었더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몇 차례 사무적인 관심과 차가운 무관심을 반복하며 커피 한 잔과 함께 이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더라면, 하고 무수히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Y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 내가 무고한 사람 잡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라는 명분과 확신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나는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의 이 말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중심을 잡아 주었던 Y에 대한 나의 작은 성의였다고 생각한다.     

 

고마움을 갖고 돌아 나왔는데, 이후에 작은 오해가 발생했다. 그가 S선생의 대변인과도 역할을 하며 우리를 적대하던 한 남 교사와 함께 교감실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워 억측을 했다. 뭐지? 왜 저 사람과 교감실에 들어가는 거지? 나에게 했던 말은 가식이었나?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흑 아니면 백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Y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 생애에서 가장 거칠고 건방지고 감당할 수 없을 말을 내뱉었다.      


- 경거망동하지 마시죠.     


순하고 예의 바르던 Y도 이 말은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그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게 최대한 정중하게 화를 냈다. 그의 해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는 그 연구실을 나왔다.      


이후에 내 마음속 가장 큰 짐은 바로 이 기억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 상황 속에서 피해자 입장에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지만 그 장면에서만큼은 이성적이지 못했고 그에게 큰 결례를 범했음은 확실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어설픔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벽이 있는 내게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기억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다른 연구실이나 계단에서 그를 만날 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극도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불편해서였을 것이고, 나는 미안해서였을 것이다.


왜 나에게는 아무도 미안하다고 말해주지 않지 라는 억울함이 나는 그럼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했나 하는 자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을 고민의 뜸을 들이다가 어느 쌀쌀하던 겨울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한 잔 하자고 말했다. 의외의 제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선뜻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 주었다.   

   

아무래도 말로 그 긴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작은 선물 꾸러미와 편지를 그에게 건네며 그동안 꼭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그는 겸연쩍게 그것들을 받았다.    

  

아마도 그날 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잘 잤을 것이다. 그 후로 그를 복도에서 마주쳐도 내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다는 것, 사과를 했다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용서의 힘이란 그 어떤 내적 노력보다 위력이 컸다.     



이 글을 쓰기까지 참 오랜 고민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관련된 이 이야기가 뒤늦은 부스럼을 만들까 두려웠고, 회고의 행위가 내게 잠재적  공황발작을 불러올까 무서웠다.

그리고 혹시 이 글로 인해 마음이 아픈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게 감당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일이 될 것이기에.


그러나 고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면서 가장 길고 오랜 시간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바라본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기록은 내게 꼭 반드시 써서 글로 남겨야 할 의무로 여겨진 이야기다. 그 작고 여린 것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내 맘같이 온정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생각보다 질기고 질리게 그들을 따라다닌다. 생각하지 못한 시공간에서 수시로 튀어나와 그새 잊었냐며 지겹도록 낯익은 얼굴을 들이민다.    

 

S선생의 명복을 빌며, 그리고 우리 삶의 굳건함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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