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무심한 언어들 4
태어남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는 일
어떤 첫 만남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으로 남기는 네 자리숫자의 날들이 된다. 그 숫자들은 그래서 때로 무척이나 은밀하고 유일무이한 나만의 비밀번호가 되어 끝까지 나와 함께 가는 숫자로 남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는 날이면서 반복적으로 불러내 기억하는 날은 당연히 생일이 될 것이다. 앳된 아이들도, 나이 지긋한 노인들도, 험악한 깡패도, 어느 외롭고 쓸쓸한 사람에게도, 울음으로 시작된 존재의 선언을 다시 불러오는 생일은 있고 그날은 누구나 스스로 특별해지는 기분을 느껴도 된다.
존재의 이유를 묻기에 좋은 날이고 삶의 의미를 다시 쓰기에도 좋은, 태어남을 다시 사유하는 날이다. 태어남이 하나의 점이라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 점을 선으로 이어가면서 살아가며, 그 선들이 서로 만나 만들어내는 면이 곧 관계와 삶이 될 것이다.
무엇을, 축하해야 할까
그러던 중 문득, 생일에는 무엇을 축하해야 하는지 묻게 되는 시간들이 있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던, 사춘기가 찾아왔던 거겠지.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했던 그 시절 속 나는 나의 존재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물음을 이어갔고 그 답으로 ‘엄마’라는 답을 찾게 되었다.
미역국을 앞에 놓고 듣는 ‘너를 낳던 날은 아침까지도 잔병치레를 하던 네 오빠를 안고…….’로 시작하는 그날의 에피소드는 모를 리 없는 이야기지만 일 년 만에 다시 들어도 묘한 긴장감이 몰려오곤 했다. 나만 모르는 ‘나’가 태어나던 날의 증언은 당연히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너를 낳았다’는 그 결말까지도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이상 호기심과 들뜬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느껴지는 이야기 끝에 어렴풋한 고향의 집들과 마당,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끝나곤 했고, 곧 생일날의 특별함은 입안에서 급히 존재를 감춘 솜사탕처럼 사라지곤 했다. 마치 그날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기특함으로 시작한 하루도 그저 그런 평범한 날로 끝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다가 내 생일이 다시 흥분감으로 재조명된 것은 ‘엄마’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나를 낳은 사람,
나를 세상에 내어준 사람,
생일을 맞은 사춘기의 소녀는 어떤 결심을 한다.
하굣길 동네 슈퍼에 들러 비싼 주방 세제를 사고 가게 주인에게 당당히 포장을 요구한다.
난감해하는 주인의 표정이 어쩌면 아직도 생생하다.
세제를 포장해야 하는 이유를 들은 주인은 어디선가 꺼낸 반듯하지도 못한 포장지를 꺼내 타원형의 세제를 둘둘 말아 준다.
아주 멋들어지진 않지만 반짝거렸다.
소녀는 뿌듯하게, 다소 부끄럼 어린 표정으로 엄마에게 세제를 내민다.
열네 살의 생일은 그렇게 조금 다르게 끝났다.
생일은 다시 재조명된다, 엄마가 되어
어쩌면 생일은 나의 날이면서 엄마의 날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아이를 낳고서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혼자만 경험한 출산도 아니면서, 조금 겸연쩍긴 해도 해마다 아이의 생일이 되면 나는 여전히 뭉클하다. 생생한 그날의 기억에 조금 울적하기도 하면서도 감격스럽고 경이롭고 찬란하다. 나 또한 내 아이에게 ‘너를 낳던 날은 백 년만의 폭설이 내렸고 아빠는 2010년 1월 5일 신문을 사러 편의점에 갔었지. 아침 8시 눈 속을 헤치고 병원에 갔는데 15시간이나 진통을 하고도 제왕절개로 너를 낳았어.’라는 억울함 섞인 에피소드를 나 역시 16년째 반복 중이다.
그렇지만 생일은 누구나 좀 그래도 된다.
아이도, 엄마도,
존재의 이유를 물어도 좋고, 삶의 의미를 다시 쓰기에도 좋고, 이유 없이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껴도 된다.
앳된 아이들도,
나이 지긋한 노인들도,
험악한 깡패도,
어느 외롭고 쓸쓸한 사람도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