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기억 속에서 나는 어느 춥고 깊은 겨울날 작은 방에서, 책상도 없이 엎드려 아빠의 솜씨로 맵시 좋게 깎은 연필을 쥐고 또박또박, 지금 생각해 보면 독서감상문이나 그 어딘가에 가까운 어떤 형태의 글쓰기를 했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1학년이었고 아마도 그것은 나의 첫 공적 글쓰기였을 것이다. 내 감정의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그때의 느낌을 찾으라면 일종의 흥분, 해방감, 개운함으로 점철된 몰입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쓴다는 행위로부터 왠지 모를 즐거운 엔도르핀이 연필을 쥔 손을 휘감았고, 내 안의 이야기를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에 끄적임을 멈출 수 없었으며, 흡사 눅눅한 이불속을 뒤집어 따가운 봄 햇볕에 말리는 듯 개운한 극도의 몰입감이 있었다. 진짜다. 그게 바로 내게 '날카로운 첫 키스'와도 같은 첫 글쓰기의 느낌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대답하는 치열한 자기와의 대화이고, 그런 점에서 외롭고 고독한 행위일 수 있지만 그 전에 내적 독백이 지니는 순수한 쾌감을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좋은 글쓰기로 가는 단계로의 이행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것이 앞선 '좋은 글쓰기란 무엇인가 1'에서 이야기한 부분이다.
그러나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언제나 즐거운 것도 아닌 데다 쓰고 싶을 때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인 상황에 나를 놓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야 했는지 생각을 해 본다. 직업상 그런 질문을 자주 받기도 하니까. 큰 질문에 작은 답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서지만 답은 한 두 개가 아닐 것이기에 어떤 대답도 어떤 상황의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소박함으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은 '호흡'이라는 단어다. 좋은 글은 호흡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여기서 호흡이란 다양한 맥락에서 설명된다.
먼저 서-본-결 흐름의 호흡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좋은 글은 본문(주제)을 전달하기 위한 좋은 시작과 좋은 맺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구조적 완결성'이다. 시작다운 시작과 맺음다운 맺음이 있어야 한다(하고 싶은 말이야 누구나 어찌 됐든 손으로 발로 전달하니까 본문다운 본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500밀리 콜라 페트병을 생각해 본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콜라 병의 부드러운 곡선은 사람이 안정적으로 손에 쥐고 음료를 마시도록 만들어졌다. 좁은 입구에서 넓어지다가 몸통 부분을 지나 다시 좁아진 후 바닥은 병을 지지하도록 다시 안정적으로 넓어진다. 페트병의 이와 같은 형태는 좋은 호흡의 좋은 예가 된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정사각형 형태의 물병을 상상해 본다. 병을 손에 쥐기 힘들어 두 손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내용물은 왈칵 쏟아질 것이다. 어찌어찌 목은 축이고 마시고 세워 놓을 수는 있겠지만 몸도 마음도 불편한 구조이다.
샌드위치를 떠올려도 좋다. 우리는 대개 샌드위치를 내용물로 구분해서 햄치즈 샌드위치, 에그 마요 샌드위치, 치킨 퀘사디아 샌드위치라고 하지 아무도 우유식빵 샌드위치 혹은 호밀식빵 샌드위치 등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즉 샌드위치의 내용물을 먹기 위해 샌드위치를 구매할 뿐이다. 다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햄치즈건 에그마요건 그것들을 먹기 위해선 반드시 두 장의 식빵이 아래와 위에서 그 맛난 것들을 견고하게 감싸고 있어야 내용물을 모두 아름답게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장의 식빵은 한 편의 글에서 우리의 주목에서 살짝 비껴 있는 듯하지만 반드시 중요하게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시작과 맺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약장수가 약 하나를 팔더라도 '약 사세요, 만 원입니다.'라고 본론만 전달하기보다 '요즘 같은 환절기 좀 피곤하지 않으세요?'로 시작해서 '당신의 건강을 기원합니다'로 맺어야 좋은 약장수이지 않을까.
다음으로 문단 나누기의 호흡이다.
앞에서 말한 서-본-결의 호흡은 사실상 문단 나누기로 구체화된다. 문단은 글을 내용이나 형식을 중심으로 크게 끊어 나눈 단위로, 몇 개의 문장이 모여 이룬 생각의 단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중심된 생각을 담은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의 짧은 글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속도감 있는 온라인 플랫폼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일에 문단을 나누는 것을 낯설고 어색해한다. 문단이 없어도 대체로 하나의 의미 단위를 이루어 주제를 전달하는 서너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문에 익숙한 것이다. 단순히 ENTER 키를 누른다고 구현되는 것이 아닌데, 문단을 나누라고 하면 이 키에만 열을 올린다.
그러나 서본결이 없는 글이 정사각형 물병과 같다면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 않은 글은 들숨만 있고 날숨은 없는 호흡과도 같다.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크게 두 가지 사고 행위를 하는데 하나는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주는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한 정보를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작가에게만 쓰기 호흡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굳이 아이트래커 같은 문물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쉬어가며 독자 나름의 읽기 호흡을 유지하며 글을 읽는다. 그런데 문단이 나뉘지 않은 글을 읽는 독자는 일단 글을 읽기는 시작했는데 어디서 잠시 머물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방황하게 된다. 그것은 길이가 길지 않은 글이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자기소개서를 쓰는 수험생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한다. 자기소개서의 글자 수는 보통 1500자 이내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수험생의 이야기는 짧게는 3년, 길게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압축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자기소개서의 서사는 실제로 잦은 호흡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숨을 들이켜긴 했는데 어디서 내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은 세상에 없다. 이처럼 문단 나누기는 한 편의 글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필수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쓰기 행위이다.(단,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또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 단위는 제외다. )
끝으로 '생각 더하기 사례'의 균형에서 오는 호흡이다.
얼마 전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에세이집을 읽었다. 수년 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에세이류 가운데 실패하지 않을 한 권을 선택하는 일은 다소 괴로운 망설임을 대동하는 일인데, 그 책은 제목도 나의 관심사와 정확히 일치했고 20쇄 이상 초판을 거듭 찍어내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스테디셀러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는 세 번째 제목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숨이 차서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독자로서, 비슷한 생을 살아가는 여자로서, 글 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작가의 많은 사유와 느낌이 어떠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몹시 궁금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 작가는 사유를 이끌어 내었던 자신만의 경험과 에피소드는 모두 생략한 채 결론만 정제하여 굴비 엮듯 줄줄이 던져주고 있었다. 사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고 호흡이 가빴으며 잠시 머물러 생각할 만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찾을 수가 없어 책 속에서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앞서 말한 문단 나누기가 독자가 작가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며 숨을 쉴 물리적 공간이라면, 말하고자 하는 바에 타당하고 알맞은 사례를 자신의 생각(주장) 앞 혹은 뒤에 배치하는 일은 작가가 내용으로 제공하는 호흡의 화학적 공간이다. 주제에 부합되는 정제된 에피소드는 글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한 근거도 되고, 어떤 묵직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가벼운 쉼도 된다. 그 속에서 설득과 감동(둘 다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의 싹이 튼다. 그것이 에세이류가 아닌 학술적 글쓰기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은 수학 성적으로 가고 취직은 영어 성적으로 하고 승진은 국어 성적으로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럼 수학을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거네.'하고 어깃장을 놓지만 그들조차 돌아서는 순간 '승진은 국어로' 부분에 생각이 머물 것이다. 속된 표현이긴 하나 말하기, 읽기, 쓰기에서부터 문법적 이해, 문학의 향유에 이르는 국어의 다양한 양상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용의 전달은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기에 변수가 많다. 무엇을 쓰라는 조언은 그 누구도 진정성 있게 해 줄 수 없으며 그것만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다만 적어도 위의 세 가지는 그런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말하듯 숨쉬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전달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가 될 것이다. '호흡' 이 한 가지를 분명히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작가의 호흡으로 초고를 쓴 후, 독자의 호흡으로 그 초고를 읽어 봐야 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숨이 가쁘거나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을 작가와 독자의 상호 호흡에서 찾아 보길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