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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Jul 21. 2021

이해에도 연습이 필요할까요?

코로나 시국 아이 키우기

코로나 시국, 아이가 예민해졌다.


아직 공부 책상이 없는 아이가 거실 탁자에서 영어 학원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빠의 참을 수 없는 재채기 소리가 미처 음소거를 하기 전에 발사되며 수업에 생중계되었고,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는 눈빛을 보낸다. 아이의 표정은 괜찮지 않다.


조심한다고 조심하면 왜 더 소리는 크게 나는지, 싱크대에서 컵 하나만 살짝 꺼낼 요량이었는데 쌓아 놓은 설거지 산이 무너진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런데 곧이어 어디선가 들리는 낯선 사람 소리(원격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놀란 고양이 레고가 크게 운다. 한글 그대로 옮겨도 '냐, 옹' 이라고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발화를 해버린다.


"누구네 집 고양이가 있나 봐요."


선생님의 알아차림에 아이는 당황하며 수업 화면을 잠시 끄고 레고에게 가서 '레고야, 조용히 해야 해. 소리 다 들린단 말이야.' 라며 채근한다. 그건 차마 우리에게 하지 못한 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유튜브 1인 생방도 아닌데 아이는 마치 자기만 이 수업의 크리에이터라도 되는 양 주변의 소음에 신경을 썼다. 어쩌다 택배 때문에 연달아 초인종이 울릴 때, 눈치 없는 관리사무소 아저씨가 화요 장터를 홍보하는 긴 썰을 늘어놓을 때, 아이의 표정은 울기 직전이 된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게 너무하다 싶다가도, 아직 수업과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어렵고 무서울 나이이기도 했기에 아이를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아이는 (누굴 닮았는지) 좀 예민한 편이다. 모든 면에서 다 그런 건 아니고  예를 들면 먹는 것과 관련된 부분에 예민함이 묻어난다. 줄 서서 먹는 소문난 맛집도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은 절대 사절, 테이블에 앉기 전 의자 청결 상태 체크는 필수다. 식당에 날아다니는 날파리를 용납할 수 없고 식탁에 흘린 밥풀은 바로 치워야 식사가 원활하다. 그렇다고 까칠한 성격은 아니라 친구도 많고 놀기 좋아하며 허당끼도 있는 영락없는 초등 남자아이인데, 기질적으로 감각이 좀 예민하고 완벽주의적 성향을 띤다.




그랬던 아이의 예민함이 코로나 시국을 맞아 좀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미취학 남자아이 둘이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는 윗집의 소음에도 반응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낮에 온라인 수업을 들을 때 층간소음이 너무 심하단다.


"걔들이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그래. 근데 너도 어렸을 때 엄청 많이 뛰었다. 학교 수업만 평소같이 진행됐으면 우리도 몰랐을 텐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서 더 심하게 느껴지는 거니까 이해해 보자."


옳은 소리는 반박할 수 없는 맞는 말일지라도 상대에게 가닿지 않고 무기력하게 허공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아이는 나의 말에 전혀 설득되지 않는 듯했다. 이 상황을 어찌 하지? 층고가 있는 건물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는 현대인에게 층간소음은 동반적 존재다. 이제 곧 사춘기에 진입할 아이가 세상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예민한 스트레스로 인지하기보다는 무디게 무디게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이런 엄마의 소망이 너무 판에 박은 듯한 옳은 소리로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층간소음에 대한 현대인의 숙명과 이해의 의무를 더 요란하게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 한 차가 오른쪽에서 급히 차선을 변경하며 끼어드는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급정거를 하게 되었고 여느 운전자가 그러하듯 내겐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하고 진한 분노가 시전 되고 있었다.  


"와 저 사람 진짜......."


그때 조수석에서 아이의 옆얼굴이 눈에 띈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의 막 찡그려지려는 얼굴이 내 분노 신경을 조절해 준 것이다.


"진짜, 와 진짜, 진짜로 화장실이 급했나 보네. 보나마나 급 X이네 급 X."


"......?"


엄마의 급발진 토크에 아이는 헛웃음을 쳤다. 아이의 안색을 살폈다. 아이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왜 그리 급한 운전자들이 많았는지, 얼마 못 가 우리 차는 또다시 무례하게 끼어드는 오토바이에 걸려 급정거를 하고 만다.


"아 진짜 오늘 이상한 날이네. 저 사람은 또 뭐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속도를 다시 높이려고 보니 저기 앞에 30km/h 과속 단속 카메라가 보인다. 당연스럽게도 단속 카메라는 운전자의 질주 본능을 조절해 준다. 속도를 서서히 늦추자 아이가 뜻밖의 말을 꺼낸다.


"엄마, 그 아저씨 우리 천천히 가라고 그랬나 봐. 큭."


"아... 그런가?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서 카메라에 걸리지 말라고 그랬나 보다. 맞네 맞어."


이렇게 두 모자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집까지 짧지만 긴 주행을 마쳤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이해'도 의식적인 '연습'에 의해 넓혀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하며 만난 무수한 비매너 운전자들, 무리하게 차선을 변경하고 급하게 끼어들고 급정거를 하는 그들에게 우린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그들은 때로 화장실이 급했고, 시험을 보러 가는 중이었고, 집에 짜장면이 배달되는 중이었으며, 어제 등산을 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들이었다. (실상은 당연히 모른다.) 그런데 이런 아무 말 상상 대잔치를 벌이다 보면 어이가 없어서 둘 다 웃게 된다. 그리고 짜증과 예민은 어느새 과거형이 된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이해'도 의식적인 '연습'에 의해 넓혀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연습도 반드시 맞는 말과 논리로만 달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옳은 소리도 해결의 열쇠이겠으나 다소 비스듬히 문제를 비껴가는 것도 부드러운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선산을 지키는 건 못생긴 나무라고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예전엔 그걸 몰랐다. 문제에 대해 문제를 벗어난 엉뚱한 방식으로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게 '맞는' 방식인 줄 알았다. 수학 문제가 주어졌으면 수학으로 문제를 풀어야지, 음악으로 풀 순 없지 않아? 라고 생각했었던  나, 앞에서 아이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는 예민함과 완벽주의의 기원은 이로써 그 의구심이 모두 해소가 되었다.  모두 아이를 키우면서 돌아보게 된, 달갑지만은 않은 나의 못난 모습이다. 다시 또 느끼지만 아이가 나를 키운다.


오늘 원격 수업 때 내가 재채기를 한다면 아이는 뭐라고 생각해 줄까? 레고의 긴 털이 엄마 코를 간지럽혔기 때문이지, 엄마 잘못은 아니라고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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