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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Jul 23. 2021

'컨셉'도 어려운데 '세계관'이라니

요즘 세계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저희 ae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 세계관에서 ae가 소중한 친구를 의미하거든요!"


음악방송을 놓치지 않고 챙겨본 지가 언제인지. 대학생 이후로는 없는 게 확실하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시간에 맞추어 봐야만 하는 드라마조차도 밀린 숙제처럼 느껴지면서 TV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걸그룹 에스파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차 타고 이동하면서 음악은 간혹 들으니까, 'next level'이라는 중독성 있는 노래는 익히 알고 있었고 '아 에스파가 저 그룹이구나' 하면서 무심히 흘려듣는데 리더로 보이는 앳된 소녀가 기쁨에 벅차 소리친다.


ae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 세계관에서 ae가 소중한 친구를 의미하거든요!"

ae? 세계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미'까지는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ae는 왜?


BTS의 '아미'를 안다. 나 자신이 '아미'는 아니지만 BTS라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꼭 알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리고 뭔가 문화계 국가대표 같은 느낌으로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도 가수와 팬과 팬클럽은 있었으니까. 그것이 '아미'라는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현상이 되어버린 것은 조금 낯설어도 충분히 납득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ae은 왜 내 머리를 때렸을까?


출처: pixabay(*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픽사 베이입니다)

대학 때 수강하던 <현대 소설론>에서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단어는 단연 '세계관'이었다. 가치관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세계관이라니. '세계'와 '관'의 합친 말일 텐데 합쳐 놓으니 너무 낯설었다. '윤동주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OO이라는 시어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주 쉬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 안에서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어이없게도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까만 우주에 펼쳐진 은하수와 성운, 빅뱅 그런 단어들만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냥 작가의 생각, 주제의식 정도로만 이해했어도 됐을 텐데 피부로 와닿지 않는 전공 영역의 이 단어가 몹시도 거슬렸고 어떻게든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고 싶은 단어였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세계관은 작가가 창조한 하나의 문학적 세계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어우러지는 서사의 기본 바탕이 되는 하나의 독립적 세상이다. 세계관을 듣고 은하수를 떠올린 내가 아주 몹쓸 상상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고 너그럽게 생각 중이다. 그랬다. 어쨌거나 세계관은 철저히 이 구역(*문학)의 말이었다.


내게 그런 모호함의 치욕을 안겨 주었던 '세계관'은 2021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을 수 있는 일상적 단어가 되었다. 우리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깔려버린 메타버스의 개념(현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TV 속 그 장면에서 예쁜 얼굴에 독특한 의상을 걸치고 묘한 분위기의 음악을 보여 주는 걸그룹의 입에서 이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에스파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걸그룹을 포털에서 '검색'해 본다. 내가 찾아본 aespa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출처: 위키백과)

그룹 이름인 ‘aespa’는 “Avatar X Experience”를 표현한 ‘ae’와 ‘양면’을 뜻하는 ‘aspect’를 합친 조어이며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 ae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라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팬덤명 ‘MY’는 영어고 ‘나의 소중한 친구’를 뜻하는 ‘my precious friends’에서 유래했으며 가상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독창적인 컨셉트의 기원, 멤버들에게는 가상세계 ‘FLAT’에서 인터넷 상의 자신을 본뜬 ‘또 다른 자신’인 아바타 ‘æ’(아이)가 존재하고 있다. 멤버와 æ는 ‘SYNK’를 통해서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것 외에, ‘P.O.S’라고 불리는 싱크 홀을 통하는 것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오고 가는 ‘REKALL’을 할 수가 있다.

(이 정도면 신흥 종교관 창조도 금방일 것만 같다.) 읽고 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내용은 아니고 현상이. 에스파라는 아이돌 그룹은 단지 음악을 하고 춤을 추는 아이돌 가수라는 단편적 존재가 아니라 그룹 결성에서부터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고유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따라서 '팬'이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되지 못하며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팬은 'ae'가 맞는 것이 된다. 에스파라는 그룹이 이루고 있는 메타버스이다.


컨셉? 부캐? 세계관?


생각해 보면 메타버스가 전혀 낯선 개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에서 꽃 피운 '컨셉'이라는 현상이 그러하고, 이 컨셉이 질적으로 확장된 '부캐' 열풍 또한 메타버스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재석 씨가 유산슬, 지미유, 카놀라유인 것은 1회적이고 일시적인 컨셉이 아니라 해당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다회적이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부캐가 된다. 적어도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세계관에서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제작자, 요리사로 살아가며 주변 사람들도 그를 가수와 제작자와 요리사로 대한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한 개인의 고유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를 찾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날 상황들이다. 한 개인이 여러 컨셉의 다양성을 지닐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본질적인 '나'를 찾는 것, 과연 의미 있고 중요한 걸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세상이다.


소꿉놀이의 세계관에서 나는 먼 나라 공주님이었고, 내 부캐는 종종 선생님이었다.


생각을 좀 더 과거로 돌려보면, 미취학 어린이 시절 자주 했던 인형놀이, 소꿉놀이야말로 세계관 창조와 메타버스의 진정한 기원이 아닐까 한다. 친구들과 모여 자주 하던 소꿉놀이의 세계관에서 나는, 아니 대부분의 여자이이들은 먼 나라 공주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었고 우리들의 부캐는 못하는 것 없는 똑똑한 선생님, 멋진 차를 타고 다니는 돈 많은 사장님, 사인을 잘해주는 예쁜 탤런트, 혼낸 적 없는 친절한 엄마, 옆집 아줌마가 매일 칭찬하는 공부 잘하는 아들 등 말할 수 없이 다양했다. 우리의 인형놀이에서 세계관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했다.


그 시절 나를 혼돈 속에 빠지게 했던 단어, 세계관은 이제 초등학생도 아는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다. 우습지만 그러나 내게 세계관은 아직 생소하다. 에스파의 세계관도 낯설고 남발되는 부캐들도 어색하다. 내가 그토록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던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즐거운 토요일 밤이 머지않았다. 오늘 TV를 켜면 과연 몇 개의 부캐와 세계관들을 맞닥뜨리게 될까.



*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문화 현상 전문가도 아니고 비평가도 아니기에 내용의 부족함은 친절을 담아 가르쳐 주시면 더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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