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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Sep 13. 2021

과학 하는 사람들은 좋겠다

과학 무지렁이의 이과 사람 관찰기

과학 하는 사람들은 좋겠다
봄이면 하양 꽃 노랑꽃 어찌하여 다 같은 꽃들이 다 다른 색깔로 피어나는지 색이 결정되는 화학반응 알고 보면 더 감사할 것 같아서

과학 하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가을밤 창 너머 풀벌레 소리가 아파트 12층까지 어떻게 올라오는지 소리의 파동 알면 그 신비로움을 두 배로 느낄 것 같아서
이번 생에 나는 문과라서


근무지 근처에는 지역의 유수한 인재들이 가는 과학전문 종합대학이 있고 나는 그 근처에서 그 비슷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여 8년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문과 사람이다. 나는 문학, 언어, 예술, 철학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높은 인문 예술학 추종자며 결국 삶은 인문학으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이곳에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도 그것은 변함없었다.


출근 길의 풍경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과인과 문과인의 사고방식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언어학 중에서도 문법을 전공한 사람으로, 국어교육과 내에서도 이과적 사고에 비교적 가까운 전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도 그러했다. 서른이 넘도록 이과인과 문과인의 차이에 관심이 없다가 늦게서야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두 집단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각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삶을 대면하고 있다.


전지적 혜경 시점의 이과 사람 관찰기


이과 사람은 우선 복잡한 계산식 앞에 두려움이 없다. 


어떤 사안의 알고리즘이 다양해지고 경우의 수가 복잡해지면 문과 사람(나)은 대체로 사고를 포기한다. 예컨대 A와 B 두 사람이 서로의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C, D 등의 스케줄을 상호 조정해야만 A와 B의 스케줄이 조정이 될 때, 문과 사람은 '아, 이건 안 되나 보다' 하고 펜을 놓는다. 그런데 이과 사람은 이때부터 눈동자를 굴리며 투지를 불태운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 낸다. A와 C를 우선 바꾸고 다시 B의 스케줄을 D와 조정한 후 나온 스케줄로 A와 B의 스케줄이 최종 조정되는 식이다. 그 모습에 일단 나와 다른 종류의 인간인 것 같은 무한 거리감이 든다. 어쨌든 그래서 내 결론은 '그들은 머리가 꽤 좋다'였다. 생전 관심도 없던 일반 물리학, 선형대수학, 기하와 벡터 등을 다룬 책들을 보면 별다른 이견 없이 그 결론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모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난이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던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등을 읽게 되었을 때도 그러했다. 문과 사람도 과학 교양서적 이해할 수 있어!라는 어떤 내부로부터의 억센 고집으로 읽기 시작한 책은 대부분 재미도 없었거니와 너무 복잡했다('코스모스' 제외). 저희도 다 이해하지는 못해요 라는 그들의 겸손은 분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분명 다 이해하고 있다는 멘션 같아서.


사과로 만든 과일 키보드. 문과 신기하게 작동이 된다.


또한 의외로 생활 상식과 기능이 풍부한 만능인들이 많다. 


문과 사람(나)은 프린터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거나 블루투스가 한 번에 연결되지 않거나 노트북에 낯선 알림 창만 떠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주 단순한 기계적 조작, 예컨대 사무실 전화기 벨소리의 크기와 종류를 다르게 설정하는 일 같은 것도 버튼의 수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할 때 까막눈처럼 헤맨다. 전자 제품의 배터리도 AA나 AAA 같은 상용화된 상품이 아니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기계적 문제들에 즐겁게 대처한다. 프린터를 열어 내부를 바라보는 눈에서 다정함이 엿보이고, 이해하기 참 어렵지만 블루투스가 한 번에 연결되지 않는 일 따윈 애초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노트북의 낯선 알림 창도 끝까지 검색하여 알아낸다. 물론 그만큼 우리 일상생활이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크고 작은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늘상 발생하고 내가 그중에서도 유독 망손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지만, 기계는 좋아해도 그 기계들의 메커니즘에 무관심한 문과 사람들보다 생활 문제 대처 능력 면에서 '매우 우수'한 건 사실인 것 같다. 내가 반나절을 씨름한 또는 고장이 났다고 내팽개친 무선 키보드, 커피 머신, 하다 못해 스테이플러의 고장도 그들 손에선 가볍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라떼는 그런 사람을 맥가이버 같다고 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알아먹지도 못할 비유긴 하다.)


과학 하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낮에는 매미가 울지만 밤에는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 왔다. 하루하루 조금씩 빠르게 주위가 어둑해지는 이 계절의 저녁에 아파트 창문을 열면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귓가에 얹힌다. 우리 집은 12층인데 신기하게도 귀뚜라미는 바로 발 밑에서 울듯 지척에서 뚜렷하고 생생하다.

예전 같으면 어쩜 귀뚜라미 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리네 참 좋다 하고 말았을 텐데, 이과 사람들과 8년을 근무하면서 과학에도 마음과 귀를 열고 보니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예전의 나에게 귀뚜라미 소리는 나희덕 시인이 들려준, 귀뚜르르 뚜르르 타전 소리를 보내는 숨 막힐 듯 외치는 생명의 소리이기만 했다. 이제는 그 소리가 어떻게 12층의 층고를 뚫고 내 귓가에 얹어지는지 지나칠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그렇게 궁금했지만,


막상 이 궁금증을 누군가에게 선뜻 묻기가 어려웠다.


궁금하긴 했지만 이 아이 같은 질문은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질문들과는 결이 달라서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래서 소리의 파동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아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배경 지식이 현저히 부족한 탓이었다. 잠시 동안의 망설임 끝에 물리학 전공자 김 박사님께 여쭤 보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김 박사님은 반가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아무래도 아파트라는 건물이 도체가 되어 소리가 울리는 현상 때문에 더 전달이 잘 된다고 느끼실 거예요.

그런데 사실 아파트 고층에서는 낮에 소리가 더 잘 들려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요?  

바닥은 쉽게 따뜻해지고 쉽게 식는데, 상층부의 공기는 그보다 천천히 따뜻해지고 식는 속도도 좀 더 느려요. 태양이 있는 낮에는 바닥 공기가 더 쉽게 따뜻하고 상층부의 공기는 상대적으로 차갑죠. 그래서 소리가 위로 휘고 공중에 있는 새가 소리를 잘 들어요.
 
그에 비해 밤에는 바닥이 먼저 식고 상층부 공기가 늦게 식어서 소리가 차가운 아래쪽으로 휘고 바닥에 있는 쥐가 소리를 잘 듣겠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답니다. 신기하지요?
신기하지요?

신기하지요?

신기하지요?


나는 언어적 원리를 현실에서 발견하거나 현대 국어 속에서 중세 국어의 흔적을 찾거나 음운의 변동을 이론적으로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 신비로움을 느낀다.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오던 입술소리 ㅁ과, '불현듯'에서 (나만) 들리는 유기음 ㅎ, '왈칵'을 발음할 때 일어나는 목구멍 언저리의 긴장감에 경이로워한다. 우리 김 박사님은 소리의 휨에 대해 착한 학생이 되어 설명을 경청하는 내게 신기하지요 라는 말을 덧붙이시며 빙긋 웃으셨다. 소리의 굴절을 설명하는 김 박사님의 마음도 문과 사람(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얼굴에는 문이과 융합형 미소가 번졌다.


(결론적으로 아파트 12층에서 소리는 낮이 더 잘 들린다. 그런데 밤에 유독 귀뚜라미 소리가 잘 들린다고 느꼈던 것은 주위가 조용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착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밤에 소리가 잘 들린다는 느낌은 과학적 원리에 당연한 환경적 요소가 보태진 건데 문과 사람은 평생 밤에 소리가 더 잘 들린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며 살 뻔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과학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운 과학은 그래프와 쇠구슬과 냄새나는 화학 약품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제 보는 과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더 생생히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 바람, 지는  노을, 둥근 달이 감성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몇 년 전 한 물리학 전공자로부터 상대성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시공간의 휨에 대해 이해하게 된 순간은 다소 짜릿했다. 그때부터 안타까움이 생겨났다. 알면 사랑한다는데, 온갖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해석 근거를 가지고 대상을 이해하는 삶은 얼마나 더 다채로웠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과학적 지식에 무관심한 채 살아온 40 가까운 삶을 생각하니 다소 난감했다.


이제 이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인문학은 사람, 삶, 사랑, 세상의 모든 주제를 사랑한다. 그런데 과학은 그것을 좀 더 잘 누리게 해 주고 우리를 보다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과학은 놀라는 능력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오늘 또 놀라운 놀람을 위해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프랑스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천재성은 놀라는 능력이다." 수많은 과학의 발견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목격하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으며 감탄하며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던 현상을 놀라는 능력이 있는 학자가 관찰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기에 그의 생각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발견의 시작이다. 그를 창조적 학자로 만든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다. 해결 능력은 극히 일부일 뿐, 보통의 학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을 보고 감탄하는 그의 능력이 그를 창조적이게 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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