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에 대한 자각과 관찰
2018년의 한가운데 7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직도 나는 2018년으로부터의 도망 중이었다.
곱게 넘긴 머리칼을 제멋대로 흐트러 놓는 봄의 궂은 바람과, 흩뿌리는 비와, 쨍한 볕을 몇 차례 반복하고 수십 개의 터널을 들어갔다 나오며 맨 어깨에 닿을 듯 울창한 사람들의 숲과 그늘을 지나 달리고 달렸지만 2018년의 여름은 아직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앞서는가 하면 어느새 저만치 성큼성큼 다시 앞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달리기가 불가능한 상대였는가.
나는 앞서기를 포기하고, 조금은 뜬금없고 조금은 느닷없이 휴대전화 속 사진을 정리한다. 사진 속에 차곡차곡 쌓인 과거는 왠지 이 힘든 달리기보다 나의 마음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
그 속엔 어느덧 나의 사진보다는 내 아이의 일상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아이는 미용실에서 뽀글 머리를 말고 있는 풀 죽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도 했고, 운동회 날 달리기 출발선 앞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잔뜩 몸을 움츠리고 힘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의 야무진 매무새로 서 있기도 했고, 특별할 것도 없는 거실 소파를 배경으로 냉동 핫도그를 입에 물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3년 전 내 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는 놀라워한다.
서른여섯, 그때만 해도 나는 이렇게도 '어렸었구나'.
왜 젊음은 그 순간의 감각으로 자각되지 않고 뒤늦게서야 기억으로 소환되거나 타인을 통해 '관찰'되기만 하는 걸까.
늘 그래 왔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에는 내가 얻지 못한 대학 이름을 놓지 못한 채 패배감에 사로잡혀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고등학생을 보며 부러워하곤 했을 뿐 나의 눈부신 스무 살을 스스로 지각한 적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 이후로도 나의 젊음은 그냥 늘 그렇게 시시하고 시들시들했다. 애처롭게도 고작 스무 살 때에도 그저 하루하루 젊음보다는 늙음을 향해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마흔을 앞두고 비로소 타인의 젊음을 면면히 관찰한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휴대폰을 보며 머리를 흔들어대며 웃는, 옷가게에서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핫팬츠의 길이를 몸에 대보며 고민하는, 그 누구를 의식할 것도 없이 이어폰을 꽂은 채 큰소리로 전화 너머 남자 친구와 생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너무도 분명하고 두말할것 없는 당위적 젊음에 눈부셔할 뿐이다. 나에게도 분명 있었을 찬란했던 젊음은 그저 짤막하고 감각이 모두 제거된 과거형 서사로 담담히 기억되거나, 친구나 친척 어른같은 타인에 의해 무심히 증언되기만 했다.
오늘은 이제껏 내 감각으로 느껴보지 못했던 나의 젊음을 깊이 애도하며 나의 그 찬란했을 젊음의 순간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 어느 날은 또 이 순간의 나의 젊음을 자각했던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