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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Apr 05. 2023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대화

아이가 머리카락을 잘랐다

반아이가 스스로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오후 선생님이 머리카락을 잘랐는지 물어도 끝까지 아니라고 했다. 오후에 교실에 일이 있어 잠시 올라갔더니 뒤의 일정과 다른 아이들 하원 사이에 끼인 선생님과 지금 당장 이야기 나눌 시간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 하던 일이 잘못되면 늘 "모르고 그랬어요."하는 아이.


요 며칠간 이 아이 걱정이 됐다. 나 역시 기다리는 반 아이들과 교육활동의 다음 일정 사이에 끼인 채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어 그냥저냥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에게는 '모르고 함=덜 혼남'이 선명해졌다.


다행히 오후에 뒷 일정이 없어 아이와 따로 대화할 수 있었다. 아이와 둘 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눈높이를 맞추어 둘 다 바닥에 마주보고 앉았다. 화내지 않고 최대한 온화하지만 단호한 말투를 사용하려 의식했다.


"선생님은 가짜 이야기말고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어떤 일이 생긴거지?"

"제가 머리가 간지러워서 이렇게 막 만졌는데 그렇게 됐어요."(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는 뜻)

"선생님은 이렇게 머리만져도 안 떨어지는데? 그건 가짜 이야기인 것 같아. 선생님은 진짜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가짜 이야기를 진짜인 것처럼 하면 거짓말이 들킬까봐 마음에 뾰족한 가시가 막 생긴대. 그러면 자기 전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마음은 점점 무겁고 뾰족해진대. 지금은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야."


"아까 친구들이 막 시끄럽게했고 그래서 귀를 막았는데 이렇게 됐어요. 모르고 그랬는거예요."

아이의 설명이 아찔하다.

"그럼 더 큰 일인 것 같아. 가위는 날카로워서 얼굴 주변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잖아, 많이 위험했을 것 같은데? 혹시 얼굴에 잘못 스치거나 눈을 다쳤다면 어떨지 생각해봤니?"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이 한 행동말고 니가 말하는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네, 근데 모르고 이렇게 됐어요."

"눈은 두 개인데 하나를 다치면 다시 자라나니?"

"아니요."

"모르고 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지는 않아. 이미 생긴 일은 모르고 했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거야."


"♧♧야, 가짜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되면 잘못이 점점 커지는 거야.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걸 정직하다고 말해. 선생님은 ♧♧가 정직한 어린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고, 아까 종이를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가 눈썹 위에까지 올라가서 종이를 잘랐는데 이렇게 됐나봐요. 모르고 한 거예요."

아이는 계속 [모르고]를 강조한다.

"응? 선생님은 눈썹 위에까지 종이를 높게해서 자른다는 게 이상해. 그러면 보이지 않잖아?"

"그런데 그렇게 한 거예요. "

아이의 눈은 흔들림없다.

"♧♧야, 모르고 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지금 니가 모르고 머리를 잘랐다고 해서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지지 않잖아? 선생님은 진짜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는 다시 강조한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가위가 막 움직여서 지나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선생님이 알기로 그런 가위는 아직 없어. 네가 크면 진짜 그런 가위가 세상에 나올 수도 있겠지. 분명한 건 우리 교실에 그런 가위는 없다는 거야. 선생님은 지금 니가 진짜 이야기를 할 기회를 계속 주고 있어."


나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가 가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아무도 ♧♧가 하는 말을 안 믿을지 몰라. 그렇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선생님은 ♧♧의 진짜 이야기가 궁금한거야. 이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가위로 제가 잘랐어요."

"그랬구나. 왜 그랬을까?"

"그냥 하고 싶어서요."

"그랬구나.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주었네. 그럴 수 있지. 머리카락을 자를 때 나는 소리가 궁금했거나 손에 오는 느낌이 궁금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삐뚤삐뚤한 머리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 그러면 그런 머리는 어디서 하는건지 알고 있니?"

"미용실이요."

"잘 알고 있네. 우리 교실은 미용실이 아니야. 우리반 친구들이 모두 머리카락을 자른다면 선생님은 가위를 교실에 둘 수 없을거야. 교실에 가위가 왜 있는지 알고 있니?"

"종이 자르라고요"

"그래, 게다가 이 가위는 안전가위기는 하지만 날카롭기 때문에 7살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니?"

"네"


"♧♧야, 몰랐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선생님은 네가 그걸 기억하면 좋겠어. 그리고 정직한 사람은 굉장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 ♧♧가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린이라고 생각해. 오늘 우리는 조금 정직해진거야. 오늘 이야기를 엄마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아이의 표정이 다급히 변한다.

"아니요. 안돼요."

"♧♧의 몸은 ♧♧것이지만 엄마, 아빠는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해서 오늘 이야기를 아셔야한다고 생각해. 선생님과 충분히 이야기하고 약속했으니 더 혼내지는 마세요~하고 말하는 건 어떨까?"

"네. 그건 괜찮아요."


아이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진실을 듣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25분이다(작은 활동 하나의 시간). 내 교육활동 시간이었다면 불가능했고 또 찝찝한 채로 넘어갔을 오늘의 이야기가, 아이를 조금 더 들여다보게 한다. 행사, 교육활동, 놀이에 치여 진짜의 아이와 만날 시간이 교사에게 주어지기나 한걸까? 서로 시간과 운이 맞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깊어질 새 없이 아이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고 있었을 것이다. 여러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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