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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Jul 22. 2023

추모공간에 다녀왔다

교육현장의 현실...

방학을 며칠 남겨둔 어느 날, 마음 아픈 뉴스를 접했다. 23살의 신규 선생님이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면 세세한 사연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혼자 외로웠을 것이다.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사죄해야 하는 현실에 참담했을 것이다. 학급의 일이 나의 무능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용히 넘어가려는 관리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교사는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다.


추모하고 돌아오는 길, 우리 유치원의 어린 선생님의 일이 떠올랐다.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요."

 작년의 일로 올해 담임 선생님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자퇴하게 된 유아가 있었다. 아이들이 등원하는 시간, 같은 공간에서 어린 선생님은 그 아이의 아빠로부터 폭언을 들어야 했다. 등원하는 아이들과 학부모가 그 장면을 봤다. 선생님에게는 그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꾸역꾸역 오전이 흘렀다.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는 선생님을 원장, 원감선생님이 불렀다. 아이의 아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유치원으로 걸려올지 모르는 민원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다시 전화를 걸어 상대의 기분을 살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동료)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함께 분노하고 공감했다. 오늘은 어린 선생님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왜 전화를 하라고 한대요? 그냥 통화했다 하고 하지 마세요. "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부족하고 너무 모자란 조언이었다. 선배 교사이자 동료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관리자에게 이 일의 부당함을 따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모욕을 견뎌낸 선생님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마땅히 무엇이 위로가 될지 떠오르지 않았다. 피해자가 사죄를 하기 바라는 풍토에서 어떤 위로도 다가가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우리의 분노는 두터운 업무에 납작해졌다.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우리는 방학을 맞이했다. 한 학기를 무사히 건너온 것에 대한 안도감에 서로를 축하했다. 그러나 어린 선생님의 시간이 꽤 흘러도 그날은 아프게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자퇴한 아이의 아빠보다, 주변에서 지켜주지 못한 동료들과 관리자의 외면이 더 선명하게 말이다. 

이 일이 떠오른 건, 내 마음에 남아있는 어린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추모공간에 들어섰다.

"선생님, 그곳에서 편안히 쉬세요. 이 세상은 선생님께 빚진 우리들의 몫입니다."

포스트잇에 마음을 담아 글자를 썼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3살, 너무 예쁘고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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