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를 키우며 가장 행복했던 때는 잠을 재우는 시간이었다. 나와 첫째, 둘이 한 침대에 누워 한참 이야기를 하고 간지럽히며 깔깔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짧은 발음으로 애쓰며 '엄마, 따랑해'를 듣는 것,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통통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고 콤콤한 발가락 냄새를 맡고, 내게 있는 가장 부드럽고 작으며 예쁜 목소리를 골라내어 자장가를 불러주던 수많은 밤들. 나와 첫째에게는 긴 밤의 시간이 있다.
둘째를 낳았다. 두 아이와 같은 시간을 함께 재울 수가 없었다. 신생아는 아직 모르겠지, 유아교육을 했으면서도 첫째보다 예민한 둘째를 대하기 어려웠다. 안아주면 버둥버둥 내려달라 움직이는 둘째와 방문 밖에서 기다리는 첫째 사이에서 마음에는 늘 여유가 없었다.
그때 왜 하필이면 '똑똑하고 게으르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을까? 나는 그 수면교육 책을 샀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책의 지침을 따랐다. 아이가 많이 울 때는 급성장기이기 때문에, 평소에 울 때는 아직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로 거의몇 달의 시간을 견뎌냈다.
일정한 시간마다 둘째를 눕히고 백색소음을 틀고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른다. 일찍부터 수면교육을 해서 스스로 잠이 들 수 있으면 아이도 훨씬 독립적으로 자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지쳐 잠드는 날은 있어도 혼자 편안히 잠드는 날은 없었다. 매일 밤 12시,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깨서 다시 울었다. 그럴 때면 무딘 신랑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둘째를 안아 달래곤 했다.
아이와 함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둘째가 감기에 걸린 어느 날, 잠든 아이의 자세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음을 깨달은 때다. 첫째는 아프면 다리를 꿇고 엎드려서 잠을 잤다. 그런 자세를 할 때면 어김없이 아이에게는 탈이 나 있었다. 그런데 둘째가 코감기로 고생하던 어느 날 아이의 자는 자세를 봐도 편한 것인지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는 거다. 나는 내 고집 때문에 아이가 주는 어떤 신호도 읽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로 열이 나서 쌕쌕거리는 아이만큼 '똑똑하고 게으른 엄마'가 되려 애썼던 미안함에 내 마음은 찢어졌다.
그날 밤, 12시부터 둘째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매일매일 더 안아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자장가도 많이 불렀다. 아이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함께 깔깔거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더욱더 지난 시간들이 미안하고 아팠다. 웃으며 다정하게 보낼 수 있었던 수많은 밤을 나는 아이를 울리고 안아주고 달래고 다시 울리기를 반복했다. 내 육아 중 가장 후회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린 날들이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키우는데 빠른 길은 없다. 시간과 노력과 정성, 그 모든 것이 함께 나누는 사랑이었다. 나는 그 진리는 간과한 채 어떻게 하면 더 쉽고 편하게 아이를 키울지 방법을 모색했다. 떨어져 잠들었던 날들만큼이나 쉽고 편하게 키우겠다고 목표지었던 그때가 아이에게 미안하다.
올해, 둘째가 8살이 되어 우리는 완전한 방분리를 했다. 둘째는 잠들기 전 꼭 하는 말이 있다.
[엄마, 내가 자면 나한테 와서 안아주고 뽀뽀하고 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두 아이가 잠들 때까지 두 방을 오고 가며 간지럽혔다가 괴물 소리를 내다가 '사랑해'하고 귀에 속삭이다가, 빠르게 뽀뽀하다가, 꼭 안아주다가... 깔깔거리고 산뜻한 마음으로
"잘 자, 사랑해. 오늘도 잘 큰다고 고생했어. 꿈나라에서 보자." 말하고 나온다(때로 많은 밤에 장난이 너무 길어지면 세상 단호하게 딱 자르는 날도 있다).
함께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이 시간이 재미지게 좋다(그리고 잠든 후 내 시간이 다시 생긴다는 점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