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타파-아니 여행은 여행이고 갱년기는 그냥 갱년기다

여행기 1 - 결혼 24주년 기념

by 착한새


누군가의 여행의 시작과 끝이 함께 존재하는 비행기 안, 설레고 들뜬 얼굴과 피곤하고 지친 얼굴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공간, 이 안에 나도 있다는 것이 괜히 우쭐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밤늦게 들어와서 매번 걱정하게 만드는 것 말고는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있고, 어렵기만 했던 남편 사업도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소위 말하는 갱년기인가? 권태기는 한참 전에 지난 것 같고.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리 부부 이렇게 무덤덤하게 지내도 되는 것일까?


결혼 25주년을 1년 앞둔 24주년에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 수업이 있어 시간 맞추기가 어려우니 우리 둘이만 가자고 한다. 딸 둘만 두고 해외로. 특별히 찬성을 하지도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거부도 안 한 상황이라 남편은 비행기표를 알아보며 여행일정을 추진해 나갔다.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하며 다녀오라고 해서 그냥 무심코 하와이를 가보자고 했다. 허걱! 남편이 잠깐 멈칫하는 듯하다. 일본이나 괌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하와이라고 하니 비용이며 일정 조정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박 6일 하와이 일정 확정, 둘이만 가서 둘에게만 집중하면 중년의 무덤덤함이 조금 사라질까? 아니 최소한 어느 날의 밥 먹는 모습이 싫다거나 자면서 코 고는 모습이 싫다거나 하는 감정들은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이어트를 해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비키니에 도전해 볼까? 내가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고 새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남편도 나에게 그렇겠지. 그래서 서로가 퉁퉁거리며 대화를 하는 거겠지.


아! 중년의 살은 빼기 힘들어. 여행 계획 세울 때 그대로의 몸무게를 간직 한 채 공항으로 출발. 공항 가는 버스 안에서 서로 손도 잡고 순조롭다. 떠난다는 것, 공항에 온 것만으로도 기분은 좋다. 의외로 집에 남아 있을 아이들 걱정도 많이 하게 되지 않네. 1분 1초 모든 것을 함께 하려 하면 피곤할 것이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주며 여행을 하면 되겠지 하며 비행기 안에서 각자 보고 싶은 영화나 스포츠를 본다. 문득 신혼여행 때가 생각난다. 결혼식, 폐백, 친구들과의 뒤풀이를 마치고 부랴부랴 공항에 도착해 그날의 첫 끼를 공항에서 먹고 비행기를 탔었다. 그리곤 둘이서 괌으로 가는 내내 손잡고 붙어서 가던 기억이 난다. 24년이 지난 후의 우리 부부, 각자 TV를 보다 눈이 마주치기도 하며. 근데 이것이 불편하지가 않고 좋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의 피곤함을 나 스스로 떨쳐 버리니 이리 편해지는 것을 왜 좀 미리 깨닫지 못했을까? 요사이는 너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아닌가 좀 미안함 감이 들 정도이니...


흠, 냄새부터가 다르다. 물을 잔뜩 머금은 듯한 나무 냄새를 풍겨온다. 뭘 많이 보려 하지 않고 뭘 많이 하려 하지 않고 내 눈에 파아란 바다만을 담아가기로 다짐한다.

시간만 나면 맨발로 호텔 앞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많이 챙겨갔는데 주변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텔에서 빌려주는 대형타월 한 장이면 끝. 타월 한 장 모래사장에 깔아 놓고 누워 있다가 살짝 더워지는 거 같으면 튜브 들고 바다로 입수. 둥둥 떠다니다가 햇살이 너무 따가우면 다시 들어와 누워 있고... 그러다 지치면 호텔에 들어와 낮잠 자고. 남편이 서핀 보드를 타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 혼자 타고 오라고 보내고(옛날 같으면 그럼 나는 뭐 하냐고 싫은 소리를 했을 텐데, 지금은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나는 해변에 혼자 있어도 돼요, 아니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도 갖고 싶었네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남편이 입으로 불다가 힘들어 침대에 누워서 불었던 파란색 튜브를 타고 혼자 바다로 나가보았다. 처음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고 긴장했는데 5살 정도의 꼬마아이가 튜브도 없이 파도를 즐기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해변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시원하고 편안하지만 앞에 큰 파도가 오면 또다시 긴장하고... 저 멀리 서핀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보여 눈을 비비며 열심히 남편을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실패, 그렇다고 이 튜브를 타고 거기까지 갈 수는 없고. 그러다가 다가오는 파도를 보지 못해 물을 흠뻑 맞게 되고... 신나게 즐기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찾는 것 포기하고 느긋하게 뒤로 누워 태양을 즐기고 있는 데 벌겋게 상기된 남편이 옆에 와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먼 곳까지 나와 있었나 보다. 해변에서 나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바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한다. 혼자서 바다로 나와 있을 줄은 몰랐나 보다. 중년의 부부가 이런 건가? 서로 옆에 있으면 조금은 귀찮지만 안 보이면 궁금해하고 찾게 되는... 물론 외국이라 좀 과장되게 걱정되는 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해가 지면 호텔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아무래도 둘만 있으니 서로가 더 챙겨주게 된다. 아이들이 있으면 얘들 먼저 챙겨주느라 서로를 못 챙기게 되는데 온전히 둘이만 있다 보니 이점이 가장 좋네. 그래 먹는 것이 제일 사람을 섭섭하게도 하고 기분 좋게도 하니까.


신혼여행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공간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같이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즐거웠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공유해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행복했으니까.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회사일이 바빠지고, 서로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시간과 감정이 없어지게 되고. 돌이켜보면 이런 과정에서 서운함과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로 태어나 우리로 살다가 다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서로에게 잘해주기 바빴던 신혼시절에는 누구의 아내가 먼저였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엄마가 먼저였으니, 결혼 후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외하고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온전히 찾아내지는 못 했다.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특별히 재미나는 일도 없고 옛날처럼 가슴 뛰는 취미거리를 찾지 못했다. 또한 쉽게 푹 빠지지도 못하겠다. 나이 오십이 주는 중압감에 못 이겨 자꾸 뒤로 숨으려고만 한다. 매일의 반복을 지겨워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매번 잠자리에 들어 하루를 후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에 많은 다짐을 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어떤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내겐 이번 여행이 그렇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으로 인해 어깨 확 드러나는 과감한 옷도 입어보고 짧은 핫팬츠도 입고 돌아다녔다. 내 바로 앞에서 나만을 위해 사진 찍어주는 남편이 있다. 이 남편도 사사건건 딴지 거는 마누라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남편도 나름 갱년기를 겪고 있을 것이고, 그도 또한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익숙함이 싫증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까? 매일의 반복을 지겨워하지만 새로움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니 이게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매번 여행을 계획하고 설레며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지겨움에서 살짝 벗어나는 계기가 되어 주니까.


저녁을 먹는 자리다. 우리 둘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한가 보다. 아니 워낙에 상황에 맞춰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었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도 빠르고 한번 결정한 거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는 사람이니.


팔뚝 굵어 입지 않았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저녁 해변을 걸었다. 물론 샌들은 벗어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은 남편 팔짱을 끼고. 물기 젖은 모래를 밟으며 이 사람 이런 거 하기 싫어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배려라고 생각하고, 저 사람이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던가? 다른 남편과 비교하면서 말이야. 아니 나이 오십에도 이십 때처럼 의 가슴 떨림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왜 몸만 늙어가고 가슴은 그대로인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돌아가도 지금처럼 살듯하다. 다만 한 가지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데 세상보고, 다른 사람 보고 변하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다시 공항이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업상 약속이 있다고 한다. 그럼 두 개의 캐리어에 아이들 줄 선물 보따리까지 나 혼자 가져가야 하는데... 공항버스에 태워주며 사무실이 바로 공항버스 내리는 곳이니 거기에 짐은 그대로 두고 집으로 가 있으면 본인이 짐을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다. 알았다고는 했지만 캐리어 안에 든 빨래들이 어른거리는데 어찌 그냥 두고 갈 수 있을까? 다행히 사무실에서 집까지 그리 멀지는 않으니 혼자 끌고 갈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탔다. 졸지에 짐 보따리 세 개를 끌고 가야 되네. 무슨 약속을 이리 빠듯하게 잡나? 캐리어 두 개 위에 선물보따리 하나를 얹어 조심스레 끌고 갔다. 왜 이리 소리는 시끄러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여행 잘해놓고 마무리가 이러면 어쩌라는 것이야? 현실로 너무 금방 돌아와 버렸잖아. 여행의 기운이 적어도 며칠은 가야 하는데... 그 기운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데.


그래 됐다. 갱년기는 갱년기고 여행은 여행이다. 무슨 특별한 변화가 있겠어. 다만 현재 있는 그 자리를 후회 없이 즐기면 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여행자로서의 삶을, 또 내 삶으로 돌아와서는 내 삶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파란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듯하면 하와이 해변 모래사장을 기억할 것이고 그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 가 되면 다시 공항을 찾을 것이고 다시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끝낸 사람들이 모두 있는 그 공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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