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돌, 나의 우상 -1

일상에 반항하고, 비일상에 도전하기

by 난편

2025년 10월 06일 12:20


사무실 창가 옆 조그맣게 마련된 내 자리에 앉아, 부부침실과 거실의 폭을 고민하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열어둔 창가 너머로 선선한 가을공기가 불어와 이쯤이면 에어컨을 꺼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튈 때쯤. 모니터 두 대로 가득한 나의 시야 왼쪽으로 치고 들어온 오른손이 보였다. 올해 신입으로 들어온 세 명 중 한 명. ‘Y’였다. 그는 질문거리가 있으면 이어폰을 꽂고 있는 나의 시야 안으로 손을 살포시 밀어 넣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이어폰을 빼고, ‘Y‘씨를 향해 ‘말씀해 보시죠'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뜻밖의 말을 입에서 꺼냈다.


“혹시, 뮤즈 좋아하십니까?”


바야흐로 2000년대 초 즈음, 대한민국은 아이돌 음악 전성시대였다. 친구들의 필통에는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교실 벽에는 아이돌들을 향한 사랑 섞인 고백들로 낙서가 가득했다. 친구들의 가장 뜨거운 대화 주제는 어제 가상결혼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아이돌들의 이야기였다. 이어폰을 끼고 그 사이를 말없이 지나다니던 어딘가 어두운 초등학생, 그게 나였다. 어릴 적부터 강요된 어른스러움의 결과였을까. 나는 또래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듣는 음악은 그들과 같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맞다. 나는 어릴 때부터 홍대병 환자였다. 실제로도 해외음악이 듣기 더 편하고 좋았다. 사랑, 이별을 주로 노래하는 아이돌 음악은 영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속이 니글거렸다. 토할 것만 같았다. 우연히 한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된 카툰밴드, 고릴라즈를 시작으로 해외 밴드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다. 린킨파크, 뮤즈, Sum41 등 다양한 해외 밴드음악을 얕고 넓게 알게 되었다. 소심한 자신을 비판하는 가사들, 신기하고 매력 있는 세계관들, 마약을 끊게 되었다는 자기 고백, 다양한 감정과 서사가 있는 해외음악들을 해석하고 곱씹으며 그들의 세계관을 여행하는 것을 즐겼다. 그들의 세계관이 나의 어린 시절 가치관들을 만들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즈음 12만 원짜리 디지털피아노를 어머니께서 사주셨다. 그 디지털 피아노로 뮤즈의 음악들을 따라서 연주했다. 고등학생 때는 교내노래 콘테스트에 나가서 우승을 했다. 친구들끼리 같이 만들 밴드의 이름으로 토론을 할 때, 마치 우리도 뮤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학을 진학했고,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들은 흩어졌다. 삶의 대부분이 건축으로 채워졌고, 디지털피아노는 창고로 들어갔다.


20년을 사랑한 밴드가, 10년 만에 단독내한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Y'를 통해 전해 들었다. 한 순간 등줄기를 따라 목 끝까지 통하는 짜릿함을 느꼈다. 우리는 같이 알람을 맞추고, 치열한 티켓팅에 도전했다. 성공했다. 달력에 커다랗게 MUSE라고 써놓고, 하루하루 또 살아냈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저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막연하게 뒤로 미루고 지내다가, 문뜩 공연날까지 3일이 채 안 남았을 때 뒤늦게 현실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인천까지 공연을 어떻게 보러 갈 건지, 어떻게 돌아올 건지 나에게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Y’씨의 도움을 얻어, 스탠딩석이란 무엇인지, 대기줄은 어떻게 서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고마운 사람이다. 준비를 하고 나니 좀 더 현실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두근두근함. 이미 기분이 좋았다.

여차저차 준비를 끝내고 콘서트를 앞둔 전날 오전이었다. 일본답사 중인 소장님으로부터 국제전화가 왔다. 불안을 속으로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일정이 바쁘니 나 혼자만이라도 주말에 나와서 일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즉각적으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대답은 ‘네’. 기계적인 동작으로 콘서트 티켓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우고, 예매취소 버튼을 눌렀다. 세상에 수수료가 무려 30%가 넘었다. 8명의 직원들 중, 나만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고, 그런 현실을 만든 내가 너무 미웠다. 순간 극도의 자괴감과 피로감이 내 몸을 덮쳤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모든 게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바닥을 치는 기분이 또다시 찾아왔다. 지겨울 만큼 일상적인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정말 취소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