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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Jan 02. 2021

쓰다 말 권리

다이어리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새해만 다가오면 나는 꼭 설렌다. 최면이라도 걸린 듯,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희망에 부푸는 것 같다. 지금보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할 것 같고, 더 좋은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 잘만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놈의 '잘'이 안 된다. 나는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니까.


 2021년 1월 1일. 나는 어제처럼 똑같이 늦잠을 잤다. 10시쯤 깨서 냉장고를 연다. 밀폐용기에 케이크가 보인다. 어제 밤에 오늘을 기념하려고 먹다 남긴 것이다. 새해 소망을 나눌 때 식탁 위에서 예쁘게 빛나던 케이크는 이제 없다. 밀폐용기 속에 옆으로 누워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짧은 아침을 때우고 나니 점심을 준비 할 시간이 금새 다가온다. 새해엔 떡국이니까 서둘러 떡국을 끓인다. 고기며 떡이며 만두도 왕창 넣었지만 맛이 영 아니다. 영혼의 한 스푼, 쇠고기 다시다가 하필 오늘 똑 떨어진 것이다. 새해 첫 날의 현실은 이렇다. 옆으로 누운 케이크와 조미료 없는 떡국같은.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다.


  나는 늘 연말이 다가오면 물건 하나를 두고 살까 말까 고민했다. 얼마 하지도 않는 다이어리. 그걸 사면 일년 내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자려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 '오늘도 아무것도 안썼다'는 생각이 스쳤다. 쓰다 만 다이어리는 하루 한 칸을 채울 수 없도록,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년 연말이면 다이어리를 갖고 싶었다. 그놈의 새해 소망은 해가 바뀌면 나도 새로 태어나는 줄 알게 했나보다. 이십대 때부터 그랬다. 해마다 생긴 쓰다 만 다이어리가 책장에 그득하다. 애물단지라서 버릴 수도 없다. 연초에는 열심히 써서 그림도 그리고 사진까지 붙인걸. 더이상 이 미친 짓을 그만하고 싶어서 합리적인 이유를 계속 생각했다.


'어차피 한두 달 쓰고 안 쓸 거 알아. 기분탓에 사놓고 이쁜 쓰레기나 만들지 말자. 쌓여가는 다이어리 더이상 둘 데도 없잖아. 그럴 시간도 없잖아. 저녁에 넷플릭스 보는게 더 좋잖아. 매일 똑같잖아. 사실, 더 쓸 것도 없잖아.'


  그렇게 다독이던 시간이 흘러 12월 31일. 대망의 2020년의 마지막 날이 왔다. 새해를 기념할 케이크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대형 서점에 들렀다. 대형 서점에는 유화 그리기나, 슬라임 만들기, 퍼즐 등 작은 선물 아이템들이 꽤 있어서 간단히 기념일을 챙기기 좋다.


 그런데 서점에서 정작 내 발걸음이 오래 머문 곳은 바로 다이어리 진열대였다. 작고 귀여운 것부터, 큼직한 노트형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나도 모르게 한참을 구경하고 있었다. 케이크나 선물은 보자마자 골랐는데, 다이어리 코너에서는 사지도 않을 물건을 몇 바퀴를 돌며 구경했는지. 


 사실, 연말을 앞둔 며칠 전부터 남편이 내게 다이어리를 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당신도 그럼 써볼래?"

 남편의 반응은 나와 비슷했다. 꾸준히 쓸 자신이 없으니 자기껀 안 사도 된다는 거였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받아치면서 우리 부부는 간단히 그런 불편한 물건(?)은 사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서점에서 이전의 다짐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또 다이어리에 미쳐있었다. 너무 두껍고, 일러스트가 많고, 크기가 손바닥만하게 작은 것은 피했다. 두께가 얇고, 형식이 간단하고, 칸이 큼직한 것을 골랐다. 


  이 정도면 간단하게 쓰기 좋겠다. 특별한 날을 쓰지 않아도 좋겠고, 어쩌다가 쓸 게 많아서 글이 길어져도 괜찮겠다. 혹시 또 달력으로만 쓰더라도 괜찮겠다. 어차피 간단하게 생겨 먹었으니. 그렇게 내것과 남편 것을 샀다.


 그날 저녁,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켜고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일년치 행사와 기념일을 함께 이야기하며 써내려갔다. 남편은 출근해야하는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원래는 평일에 출퇴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게되니 오히려 출근일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고나면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2021년의 휴일을 세보기도 했다. 그러나 연휴가 거의 주말에 몰린 것을 알고 금방 울상으로 바뀌었다. 이후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쓰다 마는 것이 두려워서 쓰기조차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쓰다 말 권리도 있다면 있을텐데. 나처럼 불완전한 사람의 다이어리란 쓰다 말아도 괜찮은 것이 정상일 것이다.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칸을 채울 필요도 없다. 변화가 크지 않은 나같은 사람이라면 일기도 나를 닮을 수밖에. 


 다이어리는 지구력 테스트용 평가지가 아니다. 그저 해마다 나를 북돋아 주고픈 수단으로 충분하다. 새해 소망을 응원하고, 평범한 하루를 빛나게 남기기엔 다이어리를 쓰다 마는 일만큼 제격인 일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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