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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Mar 15. 2022

"야채가게 알바 말고 차라리 글을 써"

나도 모르는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준 남편

-알바 모집-

단지 후문 새로 오픈한 야채 가게에서 파트타임 모집해요.

주업무 : 야채 소분 및 포장, 상자 나르기

근무시간 : 오전 9시 ~ 오후 1시

시급 : 10,000

연락처 : 010-123-1234


파트타임 알바 공고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3개월 전, 나는 계약직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됐다. 10년이나 전업주부였어도 최근에 일을 한 번 해보니 백수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정시 출퇴근 하는 일을 할 용기는 안났다. 그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새벽잠을 깨우는 고생을 하던 걸 더는 보기 힘들었다.


"여보 있잖아...나 시간제 알바 해보고 싶어. 9시부터 오후 1시까지고, 야채 포장하는거야. 어린이집 보내고 일하기 괜찮지 않을까? 단순 노동이면 머리도 안 복잡할 것 같고”


"내가 뭐랬어. 그냥 집에서 공부나 해. 정 돈이 벌고 싶으면 야채가게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글 쓰면 안돼? 수익형 블로그 같은거. 블로그에 광고 넣으면 되더라. 당신 글빨이면 야채가게 알바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을텐데 왜 자꾸 딴길로 새려고 해? 나 믿고 한 3개월만 매일 꾸준하게 써보면 안돼?"


남편의 제안은 나를 한 달이나 고민하게 만들었고, 한가한 어느 날 티스토리 블로그를 하나 만들었다.


그런데 쓸 말이 없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만한 주제가 뭐가 있더라? 남의 글을 복붙이라도 해야하나? 사진은? 저작권은?'

*복붙(복사,붙여넣기)


겨우 ‘화이트데이 선물 추천’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이런저런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빠르게 포기했다. 화이트데이가 되기까지 열 몇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것, 사진 편집 실력이 형편 없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빠르게 트렌드를 쫓을 감각도 없고,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인싸가 아니다.


'아니, 도대체 남편은 날 뭘 보고 블로그를 하라는 거야. 글만 쓰면 돈이 나오는 줄 아나?'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괜히 심통을 부렸다.


"그냥 지난번 야채가게 알바 할 걸 그랬나봐. 어제 티스토리에 뭐라도 좀 써보려고 했는데 어렵더라.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집안일 하고 애 키우면서 블로그까지 하라니 그게 얼마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운건 줄 알기나 해?"


"당신이 야채가게 이야기 하길래 차라리 블로그 하라고 한거잖아. 당신 쓸데없이 고생할까봐"


"나는 그냥 야채가게 알바가 맘 편해. 오전에 잠깐 일하고 월말에 몇 십만원 바로 딱 떨어지는게 편하다고. 글 써봤자 언제 얼마나 수익이 날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시간을 써? 난 그리고 글쓰는거 자신 없어"


"날 믿어. 당신은 조금만 투자하면 돼. 야채가게 알바보다 그게 훨씬 나을거야 장기적으로는. 당신은 왜 잘 하는 걸 안 하고 자꾸 겉돌기만 해? 내 말은 당신이 잘 하는 걸 하라고 하는거야"


"당신이 날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같은데... 나 글 못 써. 당신 말대로 티스토리 해 봤는데 뭘 써야할지도 모르겠더라. 그리고 난 그런 쪽엔 재능이 없어. 그런데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나한테 잘 할 거라고 잘 한다고 하냐고. 나 글 못 써!"


"아니!!!!!!! 당신 잘!!!! 해!!!!!!"


"그리고 당신 공부한거 잘 안되면 그때가서는 어쩔건데. 야채가게 알바하면 뭐가 남는데? 그래도 글이라도 쓰면 남는거라도 있잖아. 내가 잘못한거야? 당신한테 미안하다고 해야하는거야?"


남편은 눈까지 부라리며 더 세게 되받아쳤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나는 말 대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조금 지나서 그가 다가와서 말없이 안아주었고, 나는 힘이 없어서 청국장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나가지 못할 것 같았지만 힘을 내서 두부를 사러 나갔다. 못난 아내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도 나는 계속 내가 잘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블로그나 인스타에서 나는 영향을 받는 쪽이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에 푹 빠져서 열정적으로 소개할만한 것도 없다. 나는 밀려나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감각도 없다. 그런 상태다. 다음 세대를 위해 물러난 에너지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나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이걸 어쩌나.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은데’.


오늘 아침에 다시 말을 꺼냈다.


"여보, 최근에 나한테 면접 의뢰한 회사 있잖아. 10년이나 일을 쉬었는데도 연락이 오는거보면 내 자기소개서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말미에 그렇게 썼거든. '블로그를 운영중이며 조회수 45만회 이상, 20만회 이상의 글을 보유하고 있으며 평균 1만~4만 사이 조회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때 내가 열심히 했을 때 통계지. 지금은 아니잖아. 요즘은 내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그러니까 이젠 기대하지 말아줘)"


"맞아. 아마 거기서 가능성을 보고 당신한테 연락했겠네. 그런걸 인플루언서라고 하잖아. 나 어떤 IT유튜버 보고 깜짝 놀랐어. 그 사람이 영상에서 가방에 뭐가 있는지 소개해주는 영상을 하나 봤는데 그 안에 애플 맥북 신형이 있더라고. 난 당연히 그 사람 건 줄 알았어. 그런데 애플에서 이것 좀 써달라고 보내준거래. 지금이야 당신이 회사에 오라고 연락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 당신이 정말 인플루언서가 되면 당신을 채용하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 이것 좀 써달라고 오히려 제안이 들어올걸?"


'미쳤구나...당신. 멈출 줄을 모르는구나. 나한테 어디까지 기대할 작정이야’


"난 당신이 그동안 맨날 '넌 안 될거다', '넌 못 한다'는 말만 듣고 살아온 게 너무 아쉬워. 당신이 한창 꿈을 펼치던 때 '조금만 기다려 봐라. 잘 될거다', '넌 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해 봐라' 이런 말을 누가 해줬다면 지금 뭘 해도 하고 있을 사람인데. 나 사람 보는 눈 있는거 알지? 너무 뻔한 얘기지만...그 배우중에 내가 캐스팅한 ㅇㅇㅇ도 있고 지금 아주 잘 됐잖아, 내가 후배들 중에 누구누구 잘될 것 같다고 밀어줬었는데 지금 다 성공해서 감독이랑 PD하고 있잖아. 내가 본 당신도 그런 사람이야. 당신은 한 번 뭘 하겠다고 생각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내는 사람이거든."




결국 나는 힘을 내서 브런치에 기어와 글을 쓰고 있다. 그의 믿음은 나를 또 움직인다. 이 글이 아무 수익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란 것을 그도 안다.


나는 남편을 이렇게나 믿어준 일이 있을까? 남편은 믿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만 하라고 한다.


그와 나를 보면, 어쩌면 그토록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벌어져서 그런 거라고 짐작해본다.


남편은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일에 충실하다. 그러면 근평이 좋아지고 연봉도 자연히 오른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지금 하는 일에 무리가 갈 정도라면 그는 굳이 무리한 배움의 시간을 갖기 보다는 잠을 택한다. 평범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그만의 잘 사는 비결이다.


나는 좀 반대다. 낮에는 집안일하고 아이를 챙기고 밤에는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늦게까지 안 잔다. 그렇게 10년 살면서 면허도 따고 자격증도 여럿 따고 재봉질도 배우고 영어도 꽤 하게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게 어렵지만 그래도 고요한 밤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시간을 쪼개 쓰는것이 익숙하다.


집안일과 육아가 내 본업이지만 자꾸 다른 데 기웃거린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만큼 끝까지 가본 적은 없다. 낮에는 가정을 지켜야 하니까.


어쩌면 남편은 시간을 쪼개가며 사는 나를 보면서 안쓰러웠을 지 모르겠다. 그 마음을 내게 믿음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할때만 해도, 나도 모르는 내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이가 좋은 배우자 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이 마무리되어 가는 지금은 다르다. 나도 모르는 내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신밖에 없다. 그런걸 배우자에게 기대하면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노력하는 모습을 알아봐주고 응원해주면 되지 않나.


남편이 보는 내 가능성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나를 그런 모습으로 봐 준다면 그런 줄 알면 될 일이다.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믿음'으로 표현해주는 것에 고마워하면 될 일을.


그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고 싶었던 나는 여전히 못난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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