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하던 아기, 어느 날 "윙~치키, 윙~치키"
29개월 전후로 말문을 트기 시작한 내 아이는 그 전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 물밖에 모르던 말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만 40개월 4살인 아이는 지금 어린이집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차분히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31개월쯤 되었을 때는 어린이집에서 배변훈련을 하느라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쉬하는 연습을 했는데
쉬가 나오지 않을때 "쉬가 여기서 코~ 자나봐요 쉬가 안 나와요."라고 말해서
담임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40개월이던 최근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달팽이 두 마리를 선물 받아 왔길래
달팽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더니
"엄마. 나는 꿈달팽이로 할래요. 얘는 항상 잠을 자니까요. 꿈나라에서 꿈을 꾸고있는 꿈달팽이라서 그래요"
라는 생각주머니를 터뜨려 나를 놀라게 했다.
말 못하는 아기의 엄마로 살았던 날들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아이의 이런 말들이 더욱 감사하게 다가왔다.
'언어발달' 에 대한 걱정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아이의 생각주머니에서 터져나오는 보석같은 말들을 주워담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이제는 아이와 내가 걸어왔던 그 과정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이 곳에 소소하게나마 기록을 해보려 한다.
아이의 언어발달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생각주머니도 날로 쑥쑥 커지기에 언제 그만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끝을 정해두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계속 이어나가 볼 생각이다.
'상상력'은 아이들에게 허락된 일종의 '마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쉽게 아이들이 무한한 상상력을 경험하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책이다.
아직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일수록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상상 그 이상이다.
어릴수록 상상력에 제한이 없고, 어떤 상황을 던져주더라도 그 속에 푹 빠져 몰입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의 세계에서는 '안되는 것'이 없다.
엄마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엄마에겐 종이에 적힌 글을 소리 내 읽어내려가는 단순한 과정에 지나지 않지만
아이는 그 시간을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쓸 수도 있고,
엄마의 읽기 능력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짜릿하게 책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생생한 간접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이런 확신을 갖게된 데에는 책을 읽어주며 목격한 아이의 놀라운 변화 때문이다.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고, 이제는 그 목적을 달성했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밤 서너 권의 책을 읽어주고 있다.
소위 하루에만 열 몇 권씩 읽어주는 '책육아'를 하는 다른 엄마들만큼 많이 읽어주는 편이 아닌데도
이 정도만으로도 아이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계속 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아직도 멈추지 않고 이제는 더욱 다양한 목적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처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어떠한 고민을 안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말이 느린 아이에게 언어적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나뿐만아니라 모든 엄마들이 책을 읽어주기 시작하는 첫번째 이유가
아기의 언어발달을 돕기 위한 것일 것이다.
비슷한 개월 수 아기들이 엄마, 아빠 외에 "야옹, 멍멍, 빠방, 맘마" 등 한창 말을 배우려고
이것저것 의성어, 의태어, 옹알이라도 시도할 때
우리 아이는 '엄마, 아빠, 물'밖에 말할 줄 몰라서 조바심이 나던 터였다.
좀 더 언어적 자극에 적극적으로 노출을 시켜야 할 것 같아서
그때부터 책을 사들이며 읽어주기 시작했다.
첫 돌때 많이 산다는 유아전집을 한 질 들였었는데 스토리도 없이
의성어, 의태어 정도로만 구성된 책이 영 맘에 들지 않아서
서점을 방황하며 나름대로 알아보고 알아본 책이 바로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였다.
고작 애벌레 한 마리, 나뭇잎, 여러가지 과일이나 간식 그림이 등장하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애벌레가 나뭇잎을 먹지 않고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배가 아팠다'는
간단한 스토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의성어, 의태어만 나열된 전집보다
이 한 권의 단행본에 더 마음이 갔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아빠,물밖에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에게
책에 등장하는 이 많은 사물을 어떻게 다 설명해야 할지,
또 어떻게 상호관계나 스토리를 이해시켜서 아이가 재미를 느끼게 할 지
앞이 콱 막혔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애벌레 인형도 팔던데 그것도 같이 사야했나...하는 쓸데없는 고민도 했다.
조바심에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는 방법들을 검색해보긴 했는데
말이 좀 통하고 생각도 좀 큰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후활동을 했다는 포스팅이 대부분이라
정작 아기에게 처음 책을 읽어줄 때 어떻게 읽어야 잘 하는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서툴게나마라도 책을 보여주기 시작하니 아기는 처음에 그림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책을 통한 상호작용 역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기띠를 매고 버스를 타고 문화센터에 가는 길에
아이가 흥미있어하는 언어적 자극이 무엇이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유아 전집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나서 딱 거기 써있던 글자 그대로
창문 밖 지나가는 자동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동차가 부릉 부릉~"하고 무심코 말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갑자기 웃으며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은 내가 그런 비슷한 말을 해줘도
어설퍼서였는지 아이 눈높이에 맞지 않아서였는지 시큰둥하던 아이였다.
전집 중에 자동차 책이 있었는데 역시 의성어, 의태어가 대부분이라 별 스토리랄 게 없었다.
읽어주면서도 '이게 뭐 이해가 되겠어? 재미가 있겠어?'하고 읽어주었었는데
실제 자동차가 지나가는 상황을 보여주며 이전에 읽어주었던 내용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인데
아기는 '책 속 자동차'와 버스 밖으로 보이는 진짜 '자동차' 간의 연결고리를 찾았던 것 같다.
아마 그때 우리 아이의 심정이
'아, 이거 엄마랑 그림책 보면서 들은건데.
진짜 자동차 보면서 책에 나오는 이야기 들으니까 웃기다(?), 신기하다(?), 재밌다(?)'...정도 아니었을까?
아이가 재미있어 하길래 나도 신이나서
'자동차가 부릉부릉~~', '트럭이 덜덜덜덜~', '버스가 빠앙빠앙~', '포클레인이 윙~치키 윙~치키' 등등
즉석에서 이것저것 갖다붙여 말해주었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아기가 자신의 입술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따라해보려고 했던 순간이.
아이의 반응을 보고 나도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1. 무조건 아이가 좋아하는 관심사에서부터 시작할 것.
2. 책 속의 그림만 보여주기보다 내가 직접 아이가 좋아하는 사물을 행동이나 언어로 묘사하며 책 속 사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말하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과장해서 읽어줄 것.
집에 오는 길에도 나의 자동차 흉내는 계속되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잊지않고 다시 그 전집 속에 있던 자동차 책을 꺼내 읽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가 빠방, 차, 붕붕 이라는 말을 하는데 걸린 몇 개월의 시기까지도
우리집 방바닥에 항상 그 자동차책 3종 세트(경찰차, 소방차, 포클레인)가 굴러다녔다.
특히, 아이가 포클레인 편을 좋아했는데 그 책을 읽어줄 때면
내 두 팔을 높이 들어 포클레인처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두 손으로 땅을 파는 시늉을 하며 "윙~치키, 윙~치키"하고 흉내를 내곤 했다.
처음엔 쑥쓰러웠지만 아이가 좋아하고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니 그런 민망함은 다 사라졌다.
(이 집에 너와 나 단 둘뿐이고 우리 둘이 즐겁다면 부끄러움이 대수냐.
아무도 우리가 집에서 이러고 논다는 사실을 몰라. 심지어 아빠까지도.)
자동차 책을 계기로,
아이는 내가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윙치키"는 우리 아이만의 전매특허 포클레인 성대모사가 되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엄마,아빠,물이라는 말 외에
아이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놀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였다.
말의 즐거움을 깨닫고 난 아이는 점점 다른 것에도 관심을 확장시켜 나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