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셋 경영하는 겁쟁이 리더

<그의 불안은 어떻게 나의 시한폭탄이 되는가>

by 난새

그의 생각은 농도가 짙다. 한번 빠지면 스스로도 나오지 못할 만큼 깊고, 뇌는 구불구불하다. 그 안에서 생각은 발효를 거쳐 '확신'이 되고, 이내 단단한 '신념'으로 굳어진다.


​문제는 그 신념이 반드시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관철시킨다. 일방적이다.


그의 입은 열려 있으나 귀는 굳게 닫혔다. 입력 단자가 고장 난 스피커처럼 그는 자기 말만 쏟아낸다. 내 귀에서 환청처럼 피가 흐르는 기분이다.


그의 화법에는 기묘한 특징이 있다.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을 혼자 짊어진 순교자 같은 표정으로 운을 뗀다.


​“우리 진짜 이러면 큰일 나잖아요. 우리 진짜 이 상황 돌파해야 하잖아요. 여기서 매출 올려서 정상 궤도 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의 불안은 파도처럼 밀려와 내 일상을 잠식한다. 마치 내가 이 회사를 망하게라도 할 것 같은 죄책감을 은근히 심어주는, 고도의 가스라이팅이다. 한참을 그렇게 본인의 신념과 걱정을 전파하고 나면, 그는 내 영혼이 탈탈 털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팔자 눈썹은 애처롭게 처져 있는데, 입꼬리는 온화하게 올라가는 그 특유의 표정. 그리고 이어지는 결정타.


“할 수 있죠? 제 생각은 이래요. 이렇게 해야 시장 파이를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전혀 새로운 의견도 아니다. 상황 논리에 밀려 이미 논의 선상에서 제외됐던 케이스를 굳이 다시 끄집어낸다.


갈 길은 삼만 리이고, 처리해야 할 실무는 겹겹이 쌓여 있는데 그는 자꾸 '철학'을 논하며 브레이크를 건다.


​지하철 1호선에서 "신을 믿으라"며 일방적인 구원을 외치는 이와 그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냥 무시할 수 있는 관계라면 좋으련만, 조직에서는 그 '허황된 신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쏟아야 한다.


며칠 밤을 새워 명확한 데이터로 그의 신념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올린다. 내 보고서에는 신념 대신 '팩트'를 담았다. 그럼 그는 이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내 말은, 우리가 시장을 흔들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전략을 계속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허탈하다. 나의 며칠간의 고뇌는 '알았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와 함께 휘발된다. 향후 기조에 대한 결론도, 성과도 없이 보고서는 소멸한다.


​진짜 비극은 여기서부터다. 그 허울 좋은 신념을 상대하느라 정작 메인 업무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내 업무는 시한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응? 이게 왜 내손에 있어?>

부랴부랴 아슬아슬하게 마감을 맞춘다. 'B안까지 검토하고 발주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나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런데 다음 날, 내 결과물을 보던 그가 외친다.


"그런데 이거, B안까지 검토해 본 거죠?"

​내 입에서 "아..."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째깍거리던 시한폭탄이 결국 내 앞에서 터진 것이다. 승인 불가. 일정은 어긋나기 시작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B안 정리 과정에서는 그 어떤 '컨펌'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협박에 가까운 호소를 담은 보고를 올려도 소용없다. 그는 다시 자신의 핀셋을 꺼내 든다. 디테일을 챙기는 '핀셋 경영'이라 자위하겠지만, 내 눈엔 그저 실무자의 의지를 짓밟는 '핀셋 고문'일뿐이다.


​누군가 핀셋 경영을 예찬한다면, 나는 그 핀셋을 빼앗아 부러뜨리고 싶다. 그 핀셋에 집힌 것은 프로젝트의 완성도가 아니라, 오늘 하루도 버텨내려 했던 어느 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이놈은 통제 범위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불안을 견디지 못해 실무자에게 '위기 상황'을 전가하며 책임을 나누려 한다. 가스라이팅이다. 본인의 신념을 관철시켰을 때 짓는 온화한 미소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가짜 안도감에서 나오는 자기만족적 보상일 뿐이다. 겁쟁이.


"상사의 불안은 그의 몫이지, 나의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님을 명확히 인지하자."


​오늘 하루도 그 '핀셋' 아래서 영혼을 지켜내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나의 보고서가 소멸한 게 아니라, 그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쌓인 나의 근육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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