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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Nov 22. 2019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

비장애 형제 '캐서린'의 이야기

내가 6~7살일 무렵, 동생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는 동생이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린이집에서는 주기적으로 활동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 가정에 보내주었는데, 동생은 또래들 속에서 늘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대그룹으로 활동을 할 때 혼자서 책을 보고 있거나, 줄을 맞춰서 현장학습을 갈 때는 강가에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식의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동생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식했고, 더불어 사회 속에서 동생은 확연히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바닥에 누운 채 자신의 머리를 수차례 박으면서도 울지 않는 모습. 남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는 동생을 보며 내 동생은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제대로 동생의 장애에 대해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적당히 눈치껏, 상황 파악을 해야만 했다. 그저 ‘아, 동생은 나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르네. 내가 누나이니까 부모님을 도와서 잘 돌봐야겠다.’ 라며 으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는 감기에 걸려서 아파도 혼자서 병원에 갔다. 동생과 함께 치료실을 다니느라 바쁜 엄마는 나에게 의료보험 카드와 돈을 건네며 “이거 들고 가서 간호사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네가 어디가 아픈지 의사 선생님께 잘 얘기해. 알았지?”라고 얘기했고, 나는 “응. 걱정 마.”라며 오히려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씩씩하게 대답했다. 보통 여섯, 일곱 살 어린이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대개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건너는 것이 일상적이지만, 나는 늘 엄마가 없이 지냈기에 혼자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고서는 ‘우와! 다른 친구들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난 스스로 할 수 있네?’라고 뿌듯해하며 성취감을 느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당시에는 내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였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엄마는 동생과 함께 여러 치료실을 전전하며 다니기에 바빴고, 나는 홀로 저녁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엄마 손길이 한창 필요할 때부터 혼자서 무엇이든 알아서 척척 해결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부모님들을 소집하는 자리가 있다는 가정통신문을 받으면 ‘일시’를 확인하고는 그 시간이 동생 치료실을 가는 시간과 겹치면 아예 엄마한테 주지도 않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렸다. 오후에 하교하기 직전 갑자기 비가 쏟아질 때면, 우산을 들고 학교 교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을 보며 부러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친구들을 얕잡아보았다. 욕구가 결핍된 상황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저렇게 엄마한테 의존하는 건 나약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야. 나는 씩씩한 어린이니까, 괜찮아.’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며 나의 내면을 다독이려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한창 부모님의 관심을 받아야 할 때지만 오히려 ‘손이 안 가는 자식,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보다도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싶었지만 이를 요구해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고,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우는 것마저 포기한 나. 무슨 힘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내었을까.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나이 때만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란 채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의 모습은 한없이 어른스럽기만 해서 더욱이 마음이 아려온다.


Written by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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