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형제 '수지'의 이야기 ② by 은아, 혜연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게 와장창 무너졌어요"- 비장애형제 '수지'의 이야기① 에서 이어집니다>
(수지) 신부님의 “네가 책임질 필요 없고 네가 십자가를 질 필요 없다. 그게 답이었으면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는 말씀을 들으니까 확 이해가 되고, 그게 엄청 위안이 됐어요.
우리 비장애형제들은 정말 혼란스럽잖아요. 장애인 가족으로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결정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인생이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된 건데,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장애 형제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굉장한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리죠. 저는 이제야 이게 내 책임이 아니고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죄짓는 게 아니구나, 라는 걸 조금 알게 됐어요.
(은아) 저도 수지님의 얘기를 들으니 마음에 위로가 되네요. 그럼 그 말씀을 들은 이후에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수지) ‘그래, 성인이 되었으니, 각자의 인생을 살아보자.’라고 마음 정리를 하고서는 신부님이 여러 기관의 전화번호를 알아봐 주셨어요. 그 전화번호를 받아서 제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진짜 난리를 쳤죠. 나 보고 어떡하라는 거냐고. 이 과정에서 느낀 게, 가만히 있으면 대답을 안 해주는 거예요. 내가 엄청 목소리를 높여야만 뭔가를 해주는 거죠. 그냥 좋게 좋게 네네, 하면은 방법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룹홈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룹홈은 보통 9시-4시는 무조건 출근을 해야 하는데 제 동생은 평생 일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일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그런 사람이 그룹홈에 들어가면 당연히 적응 못할 거 아니에요. 게다가 그룹홈 선생님이 자폐성 장애인은 케어가 힘들다며 꺼려하는 말을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일할 수 있어야 하고, 선생님 말 잘 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이 들잖아요. 그래서 그룹홈에 대한 기대는 접었어요. 그게 올해 초예요.
그래도 좋은 분들도 만나게 되어서 도움을 얻기도 했고요, 복지관의 복지사 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복지사 분이 저희 집에 방문해서 동생의 생활을 살펴보더니, 제 동생을 독립을 시켜 보자는 거예요. 제 동생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하고, 신변 처리도 스스로 가능하거든요. 이 정도면 많이 하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돈에 대한 개념이 없고 강박적인 부분이 있어서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이후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은아) 와. 독립을 준비하고 계시군요. 독립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수지) 올해 12월에 동네에 있는 LH 청년 주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낮에는 활동지 원사를 연결하고, 반찬 같은 것은 해놓으면 알아서 챙겨 먹고. 복지사 선생님이 가끔 간간히 들여다 봐주는 시스템을 세팅 중이에요. 저녁이나 주말에는 혼자 있어야 해서 생활에 구멍이 많겠지만 그래도 독립을 시켜 보기로 했으니 복지사 선생님이랑 1대 1로 연습을 하고 있고요. 집에서도 훈련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은아) 어떤 훈련을 하고 계신가요?
(수지) 특히 청결 부분을 굉장히 많이 훈련을 시키고 있어요. 머리를 잘 감는 방법, 빨래하는 방법, 티셔츠는 이틀에 한번, 속옷이랑 양말은 매일 빨래통에 넣어라. 이런 걸 하루 종일 붙어서 반복적으로 하고 있어요.
6월에는 ‘한 달 살이’를 해요. 한 달 동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지 테스트해보는 기간이에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 한 달 살이도 뜨뜻미지근하게 얘기하더라고요. 1년에 한 명만 해준다는데 한 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죠.
(은아) 장애인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1년에 한 명씩만 하나요?
(수지)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지금 장애인이 몇 명인데 1년에 한 명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내 돈 내서 할 테니 세팅만 해달라고 얘기를 했거든요. 급하다고, 나는 지금 이혼도 할 판이라고 막 그랬어요. 그랬더니 제 동생을 먼저 해주겠다고 한 거예요. 먼저 하려던 분은 부모님도 아직 계시고, 조금 뒤로 미뤄도 되겠다고요. 순서가 미뤄진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진 않지만, 하여튼 요구를 세게 해야만 뭔가 좀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은아) 그러면 지금 이렇게 준비를 하고 계신 과정에서 고민이 되거나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수지) 최근 1~2년 사이에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요. 요즘에 무인 편의점이 많잖아요. 그런데 동생이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 보니 거기에서 물건을 훔쳐온 거예요. 그러니까 얘가 경찰서까지 끌려가서 직결 심판을 받고 왔어요. 자잘한 걸 갖고 왔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앞으로 주의를 주라고 하는데, 주의로 조절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일단은 큰일 난다고 계속 얘기는 하긴 하죠.
(은아) 그러면 파출소에 계신 분들은 어떻게 대응을 해주셨어요?
(수지) 제가 답답했던 부분이 있는데요. 파출소라는 곳에서는 발달장애인 친구들을 보면 보호를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뭘 훔치면 안 돼요.” 라든지 “이런 일이 있을 때는 파출소 오는 거 아니에요.” 라든지,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해 줘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그냥 가세요.” 하고 넘기는 거죠.
그러니까 동생이 본인이 잘못한 줄 모르고, 오히려 잘한 건 줄 알아요. 집에 와서 내가 동생을 혼내면 왜 혼나는지 모르고 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계속 반복적으로. 독립해서 지역에서 살아가려면 파출소가 협조를 좀 해 주면 좋을 텐데 아예 협조가 안 돼요. 파출소에서는 탈시설도 모르고 장애인들이 지금 어떤 입장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동생의 안전이 제일 걱정이에요. 제가 시설을 먼저 생각했던 게 안전 때문이니까요. 특히 동생이 여자다 보니 더 걱정스러운 것 같아요. 활동지원사는 주중 낮 시간에만 같이 지내지만 거주시설이라면 저녁이나 주말에도 누군가 이들을 케어하는 사람이 한 분은 계실 거 아니에요. 그러면 동생이 잘 있는지 뭐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이 될 텐데, 독립을 이렇게 해버리면 다른 건 좋지만 저녁이나 주말에 잘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은아) 활동 지원이 저녁이나 주말에는 시간이 안 나오는 건가요?
(수지) 활동 지원 시간으로는 주중 낮 시간 정도만 커버가 돼요. 모자라면 제가 돈을 더 내고 따로 고용을 하든지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무섭다고, 아무리 같은 동네라고 하지만 동생이 혼자 남겨진 걸 누군가 알면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옆집 아저씨가 지금은 좋은 아저씨더라도, 저도 없고 보호자가 없이 동생이 혼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저는 엄청 계속 걱정을 하는데 복지관의 복지사분들이라든지 다른 분들은 독립이 가능하다고 얘기해요.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있을지 걱정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제가 얘기하는 게 다 노파심이고 과잉보호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내 관점이 아닌 그들의 관점으로 한번 봐 보자.’라는 심정으로 독립을 준비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동생이 자유를 원하고, 혼자 있는 걸 원할 수 있고요. 내가 그렇게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오히려 동생을 귀찮게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 상황이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동생에게 사회 속에서 살아갈 기회와 자유를 주고자 이렇게 하겠다고 하니 일단 해보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은아) 지금 동생의 자립을 준비하기까지 수지님은 본업을 다 중단하고 2년간 여기 매달려 계신 거죠. 대단하시네요.
(수지) 제가 특수한 케이스죠. 왜냐하면 저는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아이가 없고, 신랑이 동생에 대해 이해를 다 해 주고 있어요. 그런 여러 가지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과연 나처럼 이렇게 동생에게 올인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2년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못할 것 같아요. 왜냐면 당장 생업이 있으니까. 저는 일은 몇 년 놔도 괜찮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내가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목구멍에 풀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죠.
(은아) 경제적인 기반이 있더라도 실행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대단하세요.
(수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엄마의 딸이니까. 처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진짜 화가 많이 났어요. 그런데 엄마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딸인지 아니까 그냥은 못 넘어가겠더라고요. 엄마들이 맨날 항상 하는 말 있잖아요.
(은아) “제발 내 자식보다 하루 더 살고 싶다” 맞죠?
(수지) 그건 좋은 말이죠. 저희 엄마는 “내 앞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고 그랬어요. 매일. 너무나 진심이잖아요. 엄마가 70이 넘으시면서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걱정이 되니 ‘차라리 네가 죽으면 내가 편하게 눈을 감을 텐데.’ 이러셨는데 엄마가 눈을 뜨고 돌아가시더라고요. 그걸 내가 봤는데 어떻게 동생을 나 몰라라 하겠어요.
엄마가 가시면서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100번도 넘게 했어요. 그걸 보는 게 싫었어요. 엄마가 나한테 왜 미안해야 되고, 왜 또 동생이라는 숙제를 나에게 안겨줘야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겪어보니,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각자의 독립이 필요해요. 그리고 각자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다 같이 협력을 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비장애인형제 분들이 많은 분들과 힘을 합쳐서 여러 대안들을 찾아보는 것도 너무 중요하고요. 가족들끼리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최대한 독립을 목적으로 같이 움직이시면 좋겠어요.
지금은 이런 독립이나 자립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진행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님이 65세가 넘어 은퇴하고 소득이 없어졌을 때, 돌아가시기 전에 준비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왜 부모님이 숨 넘어가는 것까지 보고 난 다음에야 해 주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가족이 모두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내 부모님이 웃으면서 돌아가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우리 엄마가 눈 뜨고 돌아가시게 하냐고요. 나는 그게 지금은 너무 화가 나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장애형제의 독립을
준비해야 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간 장애형제의 거취를 고민했던 수지님은 이제 장애형제가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장애형제의 '안전'이었습니다. 주중 낮 시간에는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주중 저녁이나 주말에는 이러한 지원이 없어 장애형제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노파심, 과잉보호라고 얘기하지만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기에, 형제로서, 가족으로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지님은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임을 바라며, 또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기에 장애형제가 독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비장애형제들과 장애 가족들에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장애형제의 독립을 준비할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현재 시점에서 장애형제의 독립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수지님과 형제, 각자의 독립을 응원하며 나는(It's about me!)도 그 방법을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나는(It's about me!)과 함께 더 나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비장애형제라면 누구나,
비장애형제들의 새로운 미래 찾기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세요!
<인터뷰 참여 신청> https://forms.gle/jTc5XUc8L8WF3zME9
Written by 은아, 혜연
※ 인터뷰이(interviewee)의 의견은 나는(It's about me!)의 공식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