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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un 29. 2023

지하상가에서 길을 잃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

시원한 바람이 불어 걷고 싶어졌다.




편집/출판 디자인을 배우고 있는데 평일엔 매일 디지털 드로잉 2, 격일로 편집포트폴리오 2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어 이틀에 한 번은 컴퓨터를 짊어지고 학원에 간다.


학원이 도시중심가에 있다. 주차를 할 수는 있는데 장시간 이용하면 요금부담이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집 앞에서 학원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무척 편하다. 갈 때는 바로 버스를 타고 싶은데 돌아올 땐 가끔 걷고 싶어 진다. 특히 컴퓨터를 안 들고 가는 날. 가방도 가볍고 날씨도 좋으면 금상첨화다. 그런 날은 꼭 한 정거장을 걷는다.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가방도 바람도 가벼웠던 그날. 걸을까 버스 탈까 하며 정류장에 갔더니 하필이면 집에 가는 네 대의 버스가 모두 10분 후에 도착한다기에 자연스럽게 다음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말이 한 정거장이지 실은 빠른 걸음으로 약 7분 정도의 거리라 운동하기에 딱이다. 지하철역을 낀 구간이어서다. 지상으로 차도를 건널 수 있지만 횡단보도가 꽤 멀어 지하상가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편리한 느낌의 그런 복잡한 장소다.


지하상가를 빠져나가는 지름길은 내려가자 말자 중앙 에스컬레이터가 보이는 약국 쪽으로 우회전 후 약국을 끼고 좌회전해서 멀리 보이는 양쪽 출구 중 오른쪽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좌우'인 건데 왠지 그날따라 '좌'로 가보고 싶어졌다. 일찍 마치기도 했고 몸도 가벼워서일까. 자꾸만 자유로워지기에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봤다. 그쪽은 처음이었는데 닭강정 가게가 5개쯤 연속으로 보였다. 우와! 너무 맛있어 보여서 집에 저녁거리가 준비되어 있는데도 충동구매를 할 뻔했다. 마지막 가게를 지날 땐 지갑에 자동적으로 손이 가는 걸 느끼며 군침을 삼켰다.


결국 '지출하지 않기'에 성공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에 대강 그려놓은 지도를 펼쳐보니 이제 출구가 나올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라? 근데 이게 웬일. 출구도 안 보이고 약국도 안 보였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앗. 지금 지하상가에서 길 잃어버린 거?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못 나가면 어쩌지? 우좌우인데 좌로 왔으면 우로 가면 되는 건가? 정 못 찾겠으면 돌아 나가면 되겠지만! 10분 안에 다음 정거장에 도착해야 다음 버스를 탈 텐데! 큰일 났다! 그래서 일단 무작정 우로 빙 돌아 걸어 나갔다. 처음 보는 출구가 나오길래 패스하고 계속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점찍어둔 약국이 안 보인다. 닭강정 앞에서 센과 치히로처럼 눈으로 먹어대다 돼지가 된 건가.


아무리 걸어도 처음 보는 가게들 뿐이었다. 사진관도 보이고 셀프 사진촬영소도 있었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길을 잃었으니 얼른 걸어보자며 재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갔다. 조급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봐도 내가 아는 골목이 나오질 않았다. 어쩌지... 버스 ㅠ 그냥 우좌우할 걸 그랬나 ㅠ


어쨌든 아예 우우우로 간 건 아니니까 언젠간 출구가 보일 거야 하며 더 빠른 속도로 걸었다. 약 2분 정도 더 걸었더니 저기 멀리에 익숙한 녹색 간판, 즉 약국이 보였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앞쪽으로 출구가 2개 보였고 얼른 오른쪽 출구로 얼른 뛰어 나왔다. 휴. 시계를 보니 9분이 지나있었다. 멀리서 버스들이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빨리 걸어 정류장으로 갔다. 직후에 집에 가는 버스가 딱 맞게 도착했다. 탑승하고 자리에 앉으니 땀이 뻘뻘 났다. 식은땀일 거다. 자유를 만끽하다 닭강정 거리에서 이 세계로 갈 뻔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중간까지는 머릿속에 지하상가를 맴도는 내가 계속 재생됐다. 서서히 버스 안으로 정신이 돌아오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건 글로 써놔야겠어.

웃픈 건 늘 진리지. 키득거리며 글감을 저장했다.


매일을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건 활력을 빼앗는다.

자유를 만끽하다 만나는 황당함은

인생에 웃음을 선사한다.

가끔은 어리석은 일탈이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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