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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ul 18. 2023

비가 와서

예전에 하던 걱정들이 퐁퐁 튀어 오른다.




직장 생활을 할 땐 비가 오는 날마다 참으로 걱정할 것이 많았다. 통근하시는 선생님들 비에 미끄러지실까 걱정, 등교하는 학생들 비에 축축해질까 걱정, 관리자분들 기분이 나쁘실까 걱정, 야외 놀이를 좋아하기에 비만 오면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헐크처럼 달라질까 걱정.


오래간만에 아침 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창문을 열어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투둑투둑 소리로도 들리고 방충망 사이로도 뛰어들어와 안경에도 매달린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봤다. 출근하시는 분들, 학교에 가는 중학생들이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재촉한다.


예전의 걱정들이 퐁퐁 튀어올랐지만 이제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 내가 낯설다. 직장을 그만둔 지 4년이 다 되어 가는데 교직에 있었던 기간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길어서일까. 비가 오면 그렇게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나 보다.


10년 넘게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비가 오면 모든 걸 포기하고 나도 비 오는 날의 내가 되자'라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엔 아이들도 나도 좀 편안하게 내버려 두자는 거다. 밖에 나가지 못해 힘든 건 너도나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나가서 놀다 오면 교사들도 조용한 교실을 몇 분이라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엔 하루 종일 비 온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하는 건 사실 꽤나 벅찼다. 그래서 몇 년 지나서는 그냥 '비 오는 날엔 비 오는 날의 내가 되자'라고 결심했다. 유독 비 오는 날 성격이 변하는 친구들에겐 "너는 누구니? 내가 아는 OO 이는 어디 갔니?"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본다. 비 오는 날 노래도 크게 불러보고 신나는 게임도 일부러 해보고. 가끔은 너무 신난 나한테 아이들이 말해줬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도 선생님이 아닌 것 같아요."


사회복지 현장실습으로 7월 일정을 가득 채웠다. 비가 오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기에 만나는 학생들을 '비 오는 날의 아이들'이라고 잠정적으로 설정해 두었다. 그들의 원래 성격을 잘 모른다는 가정을 한 후, 비가 오니까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의 빗장이 슬쩍 열리면서 조금 덜 힘들어진다. 그리고 나도 '비 오는 날의 나오미'가 된다.


갓 선생님이 되었을 때 '지금 알고 있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직장으로서의 학교가 낯설고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너무나 날 것이었기에 소리치는 것 밖에 한 것이 없는 것 같아 너무나 아쉽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도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을.


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훌륭한 멘토를 만나 설익었던 생짜배기 선생님의 부끄러운 과오를 잊어주길 바랄 뿐이다.



비를

핑계로

괜스레 주절거리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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