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 유독 심심하다.
오늘은 유난히 무기력하고 맛이 없는 날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것 같은 나를 만났다. 하도 심심해서 장식품처럼 놓아 둔 기타를 들고와 띵가띵가 쳐보고, 언젠가 읽어야지 했던 책들도 들춰보고, 미뤄뒀던 드라마도 정주행하려고 해봤다. 근데 정말 뭘해도 아무 맛이 안 났다. 문제집 뜯어서 먹는 기분이랄까?
뭘 해봐도 맛이 안 느껴져서 책장으로 갔다. 어쨌거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책이랑 공부니까 둘 중에 하나는 재밌겠지 하면서. 개인적으로 나는 책에다 낙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깨끗하게 둔다. 책 표지를 접거나 중간에 읽은 표시 한다고 접어두는 것도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준비가 되면 볼펜을 들고 줄도 긋고 답을 적는 ‘적극적’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동안 곱게 장식해 둔 <나를 찾아가는 질문들>이라는 책을 꺼내왔다. 빨간색과 검은색 볼펜도 한 자루씩 용감하게 대동했다.
이 책은 일러스트 다이어리북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만든 것으로 세계 유명 작가들의 명언을 예쁜 일러스트로 그려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나머지 공간에 ‘나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적어 두었다. 평소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만 답하던 걸 재미를 위해 직접 책에 적기보기로 했다.
시작할 땐 책 한 권을 다 씹어먹으리라 다짐했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멈추었다. 왜냐하면 책 속에서 내가 궁금해하던 것, 즉 ‘오늘 나는 왜 이리도 무미건조한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놓쳤거나 포기한 것이 있나요?
거기에서 얻은 긍정적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나를 찾아가는 질문들> by 미라 리 파텔
갑자기 머리 위에 느낌표가 뿅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이리도 지루하리만치 아무 맛도 없는 날을 보내게 된 것은 지난 주에 내가 포기한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 실기 시험 접수’ 때문이었다. 다음 달 중순 대학원 면접도 있어서 컴그기 시험 준비할 일정과 겹쳤기에 며칠 고민하다 실기 시험을 아예 다음 번으로 미루기로 한 것이다. 만약 무리해서 접수를 했다면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서 지금 현재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앞에서 씨름하고 있을 예정이었던 거다.
3주 전의 내가 보낸 선물상자를 뜯어본 후,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 마음이 무척 풍요로워졌다. 편안하게 면접 준비하라고 그 때의 내가 배려해준 거란 걸 깨달으며 책을 덮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심심함에 대해 적기 시작했던 글을 여유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흘러넘치는 시간 속에 만끽하게 된 여유는 종이 같아 식감은 질기고 향도 옅어 맛이 잘 안 느껴진다. 솔직히 처음엔 삼키고 싶지도, 더 먹고 싶지도 않은 풍미였다. 그런데 갑자기 바쁜 일정 가운데 잠깐씩 맛봤던 여유가 더욱 맛났던 기억이 났다. 왜 그럴까? 여유가 항상 같은 종류라면 왜 상황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 그건 ‘감사함’과 ‘간절함’ 때문인 듯 싶다. 만약 어제와 내일이 아주 바쁠 예정이었다면 지금의 여유가 조금 더 맛났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비염으로 몸이 축 가라앉아 가을에 적응하는 일 외에 다 내려놓은 요즘, 여유는 그냥 종이맛이다. 반면 한숨 돌릴 틈도 없을 때 사람들은 간절히 휴식하길 기다리고, 주어진 쉴 틈에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 같다.
‘직장을 때려치고 싶을 만큼 원했던 그 여유’란 녀석이 생각보다 맛나지 않아 놀랐다. 하지만 이것이 여유의 본모습이라면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종이맛 자체를 그리워해보기도 하고, 때론 맛있게 여유를 먹기 위해 일부러 바쁜 척 해보는 거다. 그리고 여유가 주어졌을 땐, 과거의 나에게 감사의 인사 보내는 걸 잊지말 것!
이제껏 여유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바라기만 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