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해 Apr 26. 2020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는 후배에게

나에게만 효과가 있는 충고의 나열일지도 모르지만...


"책임님, 너무 속상해요."


후배 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뭐든 열심히 하는 후배는 열심인 만큼 속상한 일도 많다. 그녀는 원래 기획 업무를 했었다. 기획 업무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육아 휴직 후 조직 개편되고, 변경된 조직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기회가 닿아 조직 이동을 신청하여 지금 부서에 오게 되었다. 이 조직은 Agile, Scrum Master, Test Manager, Quality Assurance, ASPICE, Out Sourcing Management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해 모인 조직이다. 태생적으로 각개전투를 하기 때문에 모두가 한 팀으로 일할 일이 거의 없다. 후배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어떤 분야가 있는지, 자신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새로 온 조직에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되었다. 



노비스 Novice. 캠브리지 영어 사전에 따르면 Novice는 "a person who is not experienced in a job or situation" 즉,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경험은 즉 경력, 커리어(the job or series of jobs that you do during your working life, especially if you continue to get better jobs and earn more money) 다. 회사에서 노비스는 커리어가 없는 사람이다. 후배는 소프트웨어 공학 분야에서는 노비스였다.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몰라서 처음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놀랍게도 "뭐라도 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다. 각 분야 담당자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묻더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나에게도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라도 도울게요. 시켜주세요!" 


그녀의 열정에 감동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시키는 일만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의견이 다를 경우 적극적으로 어필도 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자세로 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노비스의 열정이 사라진 나 자신을 반성할 정도로. 


하지만 노비스의 열정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많은 것이 회사다. 함께 일하면서 후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힘들어했다. 하나는 자신의 의견 수렴이 되지 않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왜 허드렛일을 하느냐'는 다른 선배의 말이었다. 


후배는 한 선배와 레터를 발행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선배와 일의 목적과 대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후배는 레터 수신 대상이 자신처럼 초보라 생각해서 내용이 좀 더 쉽고 재미있길 바랬다. 하지만 이 일에 익숙한 선배는 자신이 생각한 콘텐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후배의 생각을 충분히 듣고 설득할 시간이 없는 선배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끝냈다. 의욕을 앞세웠는데,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아, 또는 왜 그렇게 진행하는지 납득이 잘 안된 후배는 의욕이 꺾이고, 의기소침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선배가 힘들어하는 후배를 나름 위해준다고 함께 차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업무 목표는 정했어요?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회사 일이 다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데, 왜 그런 허드렛일을 해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귀찮아하는 일을 대신해달라는 거 아닌가요? 네, 회사 일은 다 중요하죠. 하물며 종이를 들어올리는 일도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후배가 나에게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이 우리 조직을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달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건데, 그 선배는 그래도 일의 중요도가 있다면서, 제가 하는 일은 안중요한 일이래요."


 <<직장 내공>> 에서 송창현 작가가 직장에서 가장 힘들 때는 조직 내에서 존재감이 없을 때라고 했다. 그녀는 낯선 분야에서 처음 와서 목표와 방향을 잡지 못해 안절부절하며, 매일매일을 겨우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제삼자가 자신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누구나 초보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직장 내공>>의 저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람들이 손 내밀어주길 기다리는 대신 내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자진해서 도맡았다.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일을 안 준다고 서러워만 했지, 내가 일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바빠서 못 챙기는 일,  힘들어서 버리는 일은 나에게 보석과도 같았다. (중략) 나에겐 잃을 것이 없었고, 그게 오히려 용기가 되었다. 그렇게 점차 조직에서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나에게 웃으며 인사했고, 나에겐 더 많은 일이 주어졌다. (p.96-97)"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노비스일 때가 많았다. 뜬금없이 외고 진학해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치고 입학한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할 때, 문과에서 이과로 복수전공을 시작했을 때 칸트 미학 공부하다 자료구조 수업 들을 때, 처음 춤을 배워 거울 앞에서 이상한 각기춤을 추는 나를 보았을 때, 첫 회사에서 아무런 지식도 없이 해외 연구소와 협업해야 했을 때, 임베디드 테스트하다가 갑자기 시스템 개발 관리 업무를 맡았을 때 등등. 과거뿐이랴. 지금도 매일 일터에서 새로운 분야를 만나고 늘 비기너이다. 


사람들의 무시와 괄시를 받아 늘 힘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내적 동기보다는 외적 동기가 더 강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 자라는 사람인데, 무시는 정말 힘들었다.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스스로 매일 쭈구리처럼 느끼면서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위대하다. 힘든 시간을 지내고 나면 더 이상 노비스가 아니다. 시간이 경력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후배의 고민에 할 말이 많았다. <<일에 관한 9가지 거짓말>> (마커스 버킹엄, 애슐리 구당)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충고'란 나에게만 효과가 있는 기법을 열거하는 것일지도 몰라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실 후배에게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글을 인용해 멋지게 말해주고 싶었다. 


"뭐라도 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실수를 해도 좋다. 실수를 통해 적어도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는 게 있다면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하지만 당시에는 생각이 안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선배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요? 중요한 일을 혼자 끌고 나갈 일도, 경력도 없고, 제가 혼자 할 중요한 일도 없는데, 그럼 그냥 가만히 있을까요?라고. 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아요. 흔들린다는 것은 나도 이 일이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조직 리더가 허드렛일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예요. 선임님이 분야를 바꿔 잘 성장하길 바라는 그분은 지금 이런 선임님의 모든 시도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계세요. 그 선배도 기획 분야로 오면 선임님보다 못할걸요? 힘들지만 그래도 몇 달 지내오면서 전보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알게 되었잖아요? 잘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계속하면 돼요."


그리고 그때는 말 못 했지만 <<커리어 스킬>> 저자인 존 손메즈의 말도 덧붙여 전해주고 싶다. 

"소프트웨어 개발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엄청나게 유리하게 작용할 때도 있다. 큰 강점은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인 관계 기술과 소프트 스킬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따르는 일반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들의 강점이다. (중략) 10년 차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찾아보기 쉽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10년 차 전문가라는 경력을 지닌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만나기 훨씬 어렵다. (중략) 타 기술직에서 소프트웨어 개발팀으로 옮기는 사람이 마주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의 선입견이다. 때로 이런 상황이 불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본인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 답답할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해야 한다. 결국 인식은 바뀐다. (<<커리어 스킬>>, 존 손메즈 저)" 


이런, 갑자기 드라마 미생의 대사도 떠오른다. 

http://program.tving.com/tvn/misaeng/14/Board/View?b_seq=11&page=1&p_size=10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이 되는 것이다. (드라마 미생) 


나에게만 효과 있는 기법을 또 열거하고 원하지 않는 조언을 한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고맙다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어서 고맙다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다. 나도, 그녀도 안다. 이번 고비를 넘겨도 또 힘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고비를 넘겨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는 선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보다 긴 회사 생활을 할 그녀에게 파이팅을 보낸다. 


파이팅! 노비스!



작가의 이전글 열심히 다이어트해도 살이 안 빠지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