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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코치 Nov 06. 2021

무궁화 꽃은 잔인하게 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이야기


 '오징어 게임'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는 넷플릭스를 구독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비디오는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기에 영상 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겜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가 없기에.. 그리고, 또 시의성 있는 소재로 글을 써야 하기에 마치 숙제를 하듯이 오겜을 시청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누가 나에게 "만약 당신이라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단호한 "No" 였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그들처럼 현재는 너무 고달프고, 미래는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 역시 "Yes"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직선의 논리가 지배하는 게임


본래 자연계에는 직선이 없고 완만하거나 꾸불꾸불한 곡선만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은 선을 긋기 시작하고, 선을 통해 내 구역을 규정함과 동시에 우열을 가리고, 내편과 네편을 가른다. 드라마에서 게임으로 설정된 유년시절의 놀이들도 가만이 들여다 보면 대개 선, 그것도 직선과 연관되어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에서는 통과선이, '줄다리기'는 중앙선이, '오징어 게임' 역시 도형의 선이 승부를 결정짓는 기준점이 된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드라마에서 선은 그저 놀이의 승패를 정하는 것이 아닌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날선 칼날과 같은 경계선이다.


직선은 물리적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도 선이 있고, 사회 시스템에도 선이 있다. 사람들은 선을 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고, 사회는 유사한 사람들을 묶어 집단으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계급이라는 것을 만든다. 대개 이것은 경제적 논리에 따른다.




계급사회의 축소판


어린 시절 소꿉놀이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신기하게도 친구들 무리안에 대장과 부하가 있고, 권력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집단 생활을 하는 인간들이 사회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치행위는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보다. 


드라마에서는 크게 3개의 계급이 등장한다. 가장 최하위 계급은 돈을 위해 모인 456명의 참가자들이다. 참가자들 안에서 무리가 지어지고, 그 안에 우두머리가 생겨난다. 그들 위에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마스크를 쓰고 있는 진행요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참가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며 살해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부여 받았지만, 실상 이들 역시 상위계급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관리당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비록 감시받는 환경이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밥을 먹고 대화할 수 있는 참가자들과 비교하면, 어쩌면 진행요원들이야 말로 강제된 익명성과 단절된 소통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받는 계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는 황금가면을 쓴 VIP들이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 있다.


이렇게 계급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와 달리 현실은 보다 교묘하다. 그럴듯해 보이는 제도와 체제, 그리고 게임의 규칙은 대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설계한다. 그곳에 모인 456명은 기득권 계급이 설계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자신의 선택' 에 의해 이 게임에 참가한다. 


“이 게임에서는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게임 속 사회는 진짜 평등한가? 평등하다고 믿었지만, 게임 안에서 생겨난 권력과 계급으로 인해 불평등과 차별이 작동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려진 인간의 어둡고 비틀어진 내면


어마어마한 황금색 돈 다발 앞에 "이러다 다 죽는다.",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목소리는 무력화된다. 타인의 목숨값은 숫자로 환산되어 보여지고 그것은 곧 내 돈이라는 과잉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학살에 대한 당위가 힘을 얻는다. 드라마 속 인간들의 행태와 폭력성에 우리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연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인간의 목숨이 자본에 의해 압도당하는 현실에서 내가 그들처럼 돈 때문에 신체일부를 내놓겠다는 신체포기각서까지 써야 할 처지였다면,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그저 '456'번이라는 숫자로 규정되는, 마치 앞만 보고 무조건 달리도록 강요받는 '경마장의 말' 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면, 나의 선택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존재이며 각자가 가진 프레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취할수 있다. 드라마에서 설계된 장치들과 달리 현실은 보다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하며, 견고한 불평등과 부조리의 구조가 무너지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경험해 왔다. 결국 우리 인류는 타인의 이타적인 행위로 인해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우리의 인간성이 이렇게 타락해 가지 않도록 세상을 보다 희망적으로 만들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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