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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Oct 01. 2021

예술을 닮은 와인 : 아픈 예술가와 귀부와인

고통과 달콤함에 대하여





무엇을 봐도 와인에 대입해서 생각하게 되는 거 보니 이것도 참 병이다. 

일본의 유명 아티스트인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과 그녀의 작품 <호박>을 보자마자 문득 어떤 와인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는 특별한 감성을 받은 대신
평범한 삶을 빼앗긴 슬픈 인간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발랄한 노란색 호박에 검은 물방울무늬가 촘촘히 박힌 이 작품은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많은 고통과 아픔이 담겨있다. 이 검은 물방울무늬는 작가인 쿠사마 야요이가 환각을 볼 때 나타나는 무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상생활에서 환각을 보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데 정확한 병명은 '이인증'이다.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 몸이 그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발병하는 증세라고 설명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가정 불화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신경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바람둥이였던 아버지는 외도를 밥 먹듯이 했고, 그런 아버지를 곁에 둔 어머니는 애꿎은 그녀에게 계속 폭력을 휘둘렀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를 감시하라고 시키기까지 했는데, 그때 목격한 아버지의 외도 현장은 어린 야요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집'은 어린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울타리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내내 폭력에 노출되며 안심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으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녀의 강박증은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쿠사마 야요이의 눈앞에 작은 물방울무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점점 개수가 늘어나더니 끝내는 그녀의 온몸을 뒤덮어버렸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물방울무늬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픔이 수많은 물방울무늬로 뒤덮이고 사라지길 바라며 말이다. 


그녀가 주로 <호박>을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 이유 또한 조금은 가슴 아프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거나 고통스러울 때마다 창고에 숨어 자신을 달랬는데, 그 창고 안에는 항상 호박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호박은 그녀의 고통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가 아니었을까? 


호박은 나에게는 마음속의 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호박은 말을 걸어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모습으로 세계의 전 인류가 살고 있는 생에 대한 환희의 근원인 것이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내는 것이다.

- 쿠사마 야요이 -


사실 정신병이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약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신의 병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 병이 불러오는 환각을 매일 캔버스에 옮겼다. 괴로움에 맞서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환각은 예술의 모습으로 재탄생하면서 그녀의 '약점'이 아닌 '특별함'이 되었다. 


자신의 약점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당당하게 드러낸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용기를 닮은 와인이 떠오른다. 




'귀부 와인'이라고 불리는 와인이 있다. 귀하게 부패했다고 하여 '귀부(貴腐, noble rot)'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한 마디로 썩은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썩었다는 건 쓸모없다는 뜻 아닌가? 왜 거기에 귀하다는 표현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썩은 포도는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없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곰팡이균에 감염된 포도만이 귀부 와인을 만들 수 있는데, 이 곰팡이는 포도의 수분을 증발시켜 당도와 과즙의 다른 성분들을 농밀하게 응축시킨다. 

건포도처럼 쭈글쭈글해진 포도는 꿀처럼 강한 단 맛을 내며 일반 포도로 만든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풍미를 더해준다.


귀부와인의 탄생은 일종의 사고였다. 


중세 독일에서는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만 와인용 포도의 수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독일 '라인가우(Rheingau)' 지역에 있는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Schloss Johannisberg)'라는 와이너리에서 포도 수확을 허락받기 위해 주교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중간에 사정이 생겨 무려 3주 후에야 돌아왔다.


수확시기가 한참이나 지난 포도 알맹이들은 이미 말라비틀어지고 곰팡이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버리기 아까워 어쩔 수 없이 곰팡이 핀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람들은 난생처음 맛보는 고상하고 진한 달콤함에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오죽하면 황금빛 황홀경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게다가 당시는 유럽이 삼각무역을 통해 신대륙에서 설탕을 수입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단 맛이 무척 귀하고 비쌌다.


원래는 버려져야 했을 이 썩은 포도들이 훗날 세계 최고의 디저트 와인 중 하나인 '샤토 디켐(Chateau d'Yquem)'까지 만들어낸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귀부와인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비싸고 귀한 취급을 받고 있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라는 곰팡이균에 감염될 확률도 희박한 데다가, 곰팡이를 적당히 성장시키기 위한 기후 조건이 무척 까다로워서 아주 적은 양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밤에 습기가 높아야 곰팡이가 쉽게 성장하는데 계속 습기가 차 있으면 그대로 다 썩어버리기 때문에 낮에는 강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으로 수분을 말려줘야 한다.)


썩은 포도라는 취약점을 당당히 드러내어 세계 최고의 디저트 와인을 만들어내는 귀부와인은 쿠사마 야요이의 아픔과 정신병을 승화시킨 작품과 무척 닮았다. 온몸에 곰팡이가 핀 포도송이와 검은 점이 가득한 노란 호박이 겹쳐 보이는 건 나뿐일까?




헝가리의 '토카이', 독일의 'TBA', 프랑스의 '소테른' 지역에서 만든 귀부와인은 '세계 3대 귀부와인'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귀부 와인의 대표 격인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을 만들어내는 '소테른(Sauternes)'의 와인들이다. 일반적으로 귀부와인이라고 하면 소테른을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호박>을 마주했을 때 떠올린 것은 소테른도 아니고 헝가리나 독일의 귀부 와인도 아닌 미국의 귀부와인인 '파니엔테 돌체(Farneinte Dolce)'였다.  왜 이 뜬금없는 와인이 떠올랐을까?



'파니엔테(Farniente)'는 미국 나파밸리에 있는 와이너리인데 동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나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눈길이 닿는 곳마다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우거져있어 마치 요정의 숲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아름다운 풍경만 눈에 담으면서 와인을 마시다 보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 '돌체 파니엔테 (Dolce Farniente)'는 이탈리아 말로 '아무 근심, 걱정 없이'라는 의미이다.


'파니엔테 돌체'는 파니엔테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무척 달콤하고 진한 황금빛의 귀부 와인이다. 말린 살구, 무화과와 같은 진한 과일향과 벌꿀, 아몬드와 같은 풍미를 느낄 수 있으며 레이블 대신 와인병에 아름다운 포도 덩굴이 새겨져 있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린 시절, 가족 소유의 종묘장에서 온실과 다양한 전원생활을 경험하며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왔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에는 유독 사랑스러운 식물들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무한, 영원과 같은 어려운 개념을 식물과 꽃의 색상, 패턴 등으로 유쾌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와이너리와 화려한 포도 덩굴 그림을 가진 이 와인이 떠오른 것도 아마 '자연'이라는 연결고리 때문이 아닐까?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 수많은 귀부 와인 중에 이 와인이 가장 '행복'에 가까운 메시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심 고통스러운 정신 질환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정신 병원에서 생활하기를 원한 쿠사마 야요이가 안타까웠나 보다.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환각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달콤하고 행복한 꿈처럼 느껴지기를 바란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파니엔테 와이너리와 같은 자연 속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에게 달콤한 '파니엔테 돌체' 한 잔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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