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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8. 2021

진짜 매너

우아함을 지키는 방법


우아함은 세상과 편하게 지내는 것이다. 나는 우아함이 등장하면 차갑고 딱딱하고 위태로운 우리의 세상이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뀐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 책 '우아함의 기술' 중


'리델 소믈리에 블랙 타이'라는 고급 와인잔을 사용하는 레스토랑에서 어떤 손님이 실수로 잔을 깨뜨렸다. 레스토랑 측에서 비용을 청구하지 하지 않자, 그 손님은 다른 잔을 가방에 챙기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이 것도 깨진 걸로 치세요


와~ 이 정도면 '손님'이라는 말도 아깝다. '손놈'이다. (참고로 리델 블랙 타이의 가격은 잔 하나에 10~15만 원 수준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비싼 와인을 마시고 와인 매너를 완벽하게 지킨다 해도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거리낌 없이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란 얼마나 천박한가?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우아한 이유는 비싼 술을 마시기 때문이 아니다. 알량한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와인 매너'라는 행동지침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와인은 잔의 다리 부분을 잡고 마셔야 하는 거야"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 가면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꼭 한 두 명씩 보인다.

솔직히 와인잔의 다리 부분을 잡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다. 잔의 볼(Bowl) 부분을 잡으면 손바닥의 온도 때문에 와인의 온도가 높아져서 그렇다는데 그럼 반대로 와인이 적정 온도보다 조금 차다고 느껴지면 오히려 볼 부분을 잡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수많은 와인 디너나 행사를 가봤지만 아무도 내가 와인잔의 어느 부분을 잡는지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걸 가지고 무례하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고급 와인잔 브랜드인 리델(Riedel)에서는 와인을 좀 더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아예 다리 부분이 없는 '리델 O 시리즈'라는 잔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행동 지침에 지나치게 구속받는 이유는 와인을 마시는 문화가 낯설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혹시 모른다고 하면 무시받지 않을까 불안하기 때문인 것 같다. 


'와인 매너'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와인의 매력을 최대한 잘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호스트가 초대한 손님들에게 와인을 따라주기 전에 시음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와인 식견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와인이 상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혹시나 손님들에게 상한 와인을 대접하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잔을 부딪힐 때 림(rim, 잔의 윗부분)이 아닌 둥근 볼 부분을 부딪히는 이유는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와인잔이 깨지지 않도록, 즉 서로 민망해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와인을 와인잔에 1/3 정도만 따르는 것도 스월링(Swirling)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공기와 접촉할 수 있는 면적을 최대한 넓게 하여 와인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함도 있지만 함께 나눠 마시는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너무 적은 양이 배분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와 따뜻한 마음이 사람을 우아하게 만든다.




위의 리델 와인잔 경우는 너무 심한 진상이고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매사에 내 위주로만 생각하다 보면 우리도 비슷한 실수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비비노(vivino) 혹은 와인 서쳐(wine searcher) 앱을 켜고 와인 가격을 비교하거나 마트에서 샀던 와인 가격과 비교하며 왜 이렇게 비싸냐고 컴플레인 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실제로 꽤 흔한 컴플레인이고, 본인이 검색한 가격이나 마트 가격에 달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는 마트에서 판매하지 않는 와인 위주로 리스트를 구성하는 경우도 많다.)


당사자는 본인이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이 와인이 마트에서 얼마인지 알고 있는데 
어디서 바가지를 씌우려고 해?


라며 의기양양해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때 나도 그랬다.  와인 좀 마셔봤다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말이다. 하지만 와인에 점점 진심이 되면서 와인 수입사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때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어쩜 그렇게 내 위주로만 생각했을까? 새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고급 와인 잔일 수록 두께가 무척 얇고 관리하기가 어렵다. 나 또한 집에서 비싼 와인잔을 여럿 깨뜨렸는데 돈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깨져버린 것에 대한 어이없음과 억울함으로 인한 정신적 데미지가 무척 컸다. 

아니 넘어뜨린 것도 아니고
손으로 살짝 톡 쳤는데
이렇게 파사삭 깨져버린다고?


이런 개복치 같이 예민한 와인잔에 물방울 모양의 물때가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른 리넨으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이거 은근 신경 쓰이는 작업이다. 내 손이 섬세한 편이 아니라 그런지 닦다가 깨뜨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서 와인을 마신다면 이렇게 와인잔이 깨지지 않게 관리하고 닦는 것 까지 모두 내가 해야 한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는 이런 귀찮은 일을 모두 대신해주고 있지 않은가?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하면 그 이후로 내가 신경 써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 일단 전문가인 소믈리에가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와 능숙하고 안전하게 와인병을 오픈해준다. (스파클링 와인일 경우에는 손님이 놀라지 않도록 펑! 소리가 나지 않게 코르크를 빼는 섬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와인잔에 적당량을 서빙해주고 내 잔이 비는 일이 없도록 계속해서 첨잔도 해준다.

그뿐인가?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을 주문하면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버킷을 가져와 와인을 시원하게 해주는 칠링(chilling) 서비스도 제공한다.


와인이 어린 편이라 브리딩(breathing)이 필요하거나, 오래된 편이라 침전물을 거르는 작업이 필요할 때는 디켄터를 가져와 그런 작업들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와인 가격에는 이런 서비스 차지(service charge)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레스토랑 와인이 아닌 내가 갖고 있는 와인을 개인적으로 가져가서 마시는 경우에는 이런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따로 내게 되는데 그것이 '콜키지 차지(Corkage charge)'이다.


만약 이런 서비스 차지를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 여기서 마시게 해 주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합당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건 컴플레인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런 서비스에 대한 개념이 없는 업장도 많아서 비싼 비용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 그득한 잔을 내주거나 분명 코르크를 수집하고 있으니 조심해달라고 했는데도 코르크를 부러뜨려놓고 사과 한 마디 없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레스토랑의 와인 가격이 비싼 이유는 오로지 이런 서비스 비용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유통'에 있다. 일단 레스토랑은 대형 마트처럼 규모의 경제가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대량으로 몇 만 병씩 구입하는 마트와 많아봤자 몇십 병씩 구입하는 레스토랑은 도매가와 소매가 정도로 구입 원가에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참고로 동대문에서 옷을 살 때 도매가와 소매가는 최소 1.5배~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유로 대형 마트에 비해 재고 부담도 크다. 대형 마트는 재고를 관리하는 물류 창고가 따로 있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물류 창고를 운영할만한 여유가 없다. 그만큼 리스크를 떠안고 구매하는 것이니 만큼 리스크에 대한 비용도 가격에 포함이 된다.


이런 상황을 손님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으니 레스토랑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와인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싼 가격으로 더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은 마음은 나도 너무나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요구하려면 상대방의 입장도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게 진상의 길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그것이 미각의 즐거움이건 배움의 즐거움이건 혹은 건강이나 다른 어떤 것이건 결국은 삶을 좀 더 행복하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돌아 봤을 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서까지 마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딱히 우아할 것 없는 일에 찌든 직장인이지만, 와인을 마시면서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얻고 조금은 우아해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아한 아줌마, 우아한 할머니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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