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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Oct 19. 2021

이 와인 맞출 수 있어요?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비밀

생각보다 체계적인 추리 게임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란, 와인병의 모양과 라벨을 가린 상태에서 와인의 맛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한 마디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편견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아예 주지 않는 것이다.


음.. 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의 명주
샤토 오브리옹 2015년 산이군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듯하다. 눈을 감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 바로 어떤 와인인지 빈티지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모습 말이다. <신의 물방울> 같은 유명한 만화책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니 오해할 만도 하다. 그래서 나도 이런 질문을 자주 들어봤다.


"너도 와인을 마시면 딱 어떤 와인인지 맞출 수 있어?"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음.. 특징이 아주 뚜렷한 와인이라면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어."


왜냐하면 와인의 맛으로 어떤 와인인지 맞춘다는 것은, 그 와인이 가진 단서를 가지고 추측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와인의 색깔, 향기, 신맛, 무게감 등 다양한 단서를 내가 아는 정보와 맞춰 하나하나 풀어가는 일종의 추리 게임과도 같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와인이 있다고 치자.


종류 : 화이트 와인
 
바디 (무게감) : 가벼움
산도 : 매우 높음
향 : 잔디 같은 풀향, 라임, 구스베리, 복숭아, 열대과일 등 풍부한 과일향


아마 와인을 좀 마셔봤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와인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정답은 '뉴질랜드'에서 '소비뇽 블랑'이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라는 포도 품종이 갖고 있는 특유의 향이 바로 푸릇한 잔디 향이다. 이 향이 아주 큰 단서가 된다.


'뉴질랜드'에서 만들어졌다고 판단한 이유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높은 산도과일의 풍미 때문이다. 특히 열대과일향은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에서 주로 느껴지는 향이다.

반면에, 프랑스 루아르 밸리에서 만든 소비뇽 블랑 와인은 과일향이 적은 편이며 미네랄 향이 더 돋보인다.


게다가 뉴질랜드에서 만든 소비뇽 블랑 와인은 유독 산도가 도드라진다. 그래서 무척 강렬하고 상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다른 와인과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특징이 뚜렷한 와인은 포도 품종과 생산지까지 쉽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와인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면? 추리해나가는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니 어려울 수밖에.. 그래서 하나의 포도 품종으로만 만들어진 와인보다 여러 가지 포도 품종을 섞어서 만든 와인을 알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단서가 많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정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고, 그것을 나만의 라이브러리로 구축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 단서가 많아도 그것을 접목시킬만한 지식(정보)이 없다면 쓸모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와인을 많이 마셔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만으로 맞추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맛과 향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같은 빈티지에 같은 와인이라고 해도, 와인이 보관된 상태나 나의 컨디션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와인에는 어떤 단서들이 있을까?


시각적 단서

색상 : 와인의 색상은 무게감과 숙성된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색상이 엷을수록 무게감이 가볍고 진할수록 무겁다. 그리고 화이트 와인은 짙은 호박색, 레드 와인은 벽돌색에 가까워질수록 오래 숙성된 것이다.

와인의 눈물

와인의 눈물 : '마랑고니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이 나타나려면 보통 14% 이상의 알코올 도수가 필요하다. 알코올의 도수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후각적 단서

와인의 향 : 포도 품종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향이 있어 품종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주고, 양조 과정에서 생긴 향(오크, 버터, 바닐라 등)과 병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향(커피, 캐러멜, 버섯 등)으로 양조 방법 및 숙성된 시간까지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미각적 단서  

와인의 무게감 : 포도 품종과 생산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더운 지역은 보통 알코올과 무게감이 높다.)

산도 : 포도 품종과 생산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서늘한 지역은 보통 산도가 높다.)

타닌 : 포도 품종과 숙성된 시간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오래 숙성되면 타닌이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와인이 주는 단서를 조합하면 내가 마신 와인이 어떤 포도 품종이고, 어떤 지역에서 만들어졌으며, 만들어진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깊게 공부한 사람들은 보다 정교한 지역과 생산자의 이름까지 맞추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서들을 모아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와인이 주는 단서와 내가 갖고 있는 정보가 중복되어 매칭 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거인 거 같다가도 저거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소거법'이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와인이 있다고 치자.


종류 : 레드와인
 
향 : 블랙베리, 검은 자두, 담배, 밀크 초콜릿, 유칼립투스
바디 (무게감) : 높음  
산도 : 중간~중간+
알코올 : 중간+


대부분의 레드와인은 '붉은 과일' 혹은 '검은 과일'의 향을 갖고 있다. 붉은 과일의 느낌이 지배적인 것도 있고, 두 가지가 절반씩 느껴지는 것도 있고, 검은 과일의 느낌이 100%인 것도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 와인의 향이 붉은 과일에 가까운지, 검은 과일에 가까운지를 먼저 생각해본다.


붉은 과일이 지배적 : 피노누아, 그르나슈, 산지오베제, 네비올로 등

붉은 과일/검은 과일 : 메를로, 까베르네 프랑, 템프라니요, 피노타지 등

검은 과일이 지배적 : 까베르네 소비뇽, 시라, 말벡, 진판델 등


물론 생산지나 기후에 따라 검은 과일이 지배적인 품종도 붉은 과일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대충 요런 식으로 나뉜다. 그럼 소거법을 시작해보자~



일단, 붉은 과일의 느낌이 더 강한 네비올로는 제외!

와인의 바디감이 무겁지 않은 말벡도 제외!

와인의 산도(신맛)가 낮은 진판델도 제외!


이제 남은 건 까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인데.. 둘 다 바디, 산도, 알코올 모두 비슷하다. 그렇다면 향을 한 번 살펴보자. 둘 다 블랙베리와 검은 자두의 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시라는 예시에 나온 밀크 초콜릿, 담배, 유칼립투스 향을 갖고 있다. 그럼 정답은? 당연히 시라다~

자, 포도 품종을 알아냈으니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 요 정도로 이야기해주면 된다.


이 와인은 시라 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이군요


좀 더 욕심을 내자면, 같은 시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라고 해도 생산지에 따라 조금 달라진다.

호주처럼 따뜻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시라는 초콜릿, 바닐라향이 풍기고 좀 더 무겁다. 반면에, 서늘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시라는 비교적 더 가벼운 편이며 그린 올리브 같은 푸릇한 향이 난다.

그러니 예시의 와인은 '호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로직은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일 뿐이며 사람마다 소거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물론 위에 예시로 보여준 표처럼 포도 품종의 특성이 정확하게 딱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와인을 만든 생산자의 기술이나 지역적 특성, 숙성된 시간, 생산된 해의 날씨 차이로도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도 테이스팅을 할 때 정답률이 어마 무시하게 높지는 않다.


가끔 이제 막 와인을 공부한 사람들이 전문가들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정답률이 높은 경우가 보이는데, 이는 아는 게 많아질수록 판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프랑스 보르도의 레드 와인들은 주로 여러 개의 포도 품종을 섞어서 만드는 블렌딩 기법을 사용하고, 미국 나파밸리의 레드 와인들은 주로 하나의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그 개성을 극대화한다. 그런데 미국의 대표적인 고급 와인인 '오퍼스원(Opus one)'은 보르도에서 와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처음 마셔보면 이게 프랑스 와인인지 미국 와인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좌) 오퍼스원  (우) 라 시레나 모스카토


그리고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전혀 다른 와인도 존재한다.

'모스카토(Moscato)'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대부분 무척 달콤하다. 그런데 '왜 모스카토는 드라이 타입이 없는가?'로 출발한 실험적인 와인이 있다. 바로 나파밸리 최초의 드라이 모스카토 와인 '라 시레나 모스카토(La Sirena Moscato Azul)'다. (미국 최고의 컬트 와인 중 하나인 '스크리밍 이글'의 와인메이커 '하이디 바렛(Heidi Barrett)'이 만든 와인이기도 하다.) 달지 않은 와인을 마시고 '모스카토'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예외 케이스도 많고, 세상에는 유명하지 않은 포도 품종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더 어려워진다. ('토우리가 나시오날'이라는 품종을 들어본 적 있는가?) 그러니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고 해도 절대 기죽지 말자. 못 맞추는 게 정상이다.


심지어 MW(Master of Wine)이라는 와인 시험에서는 정확한 생산지를 맞추지 못해도 와인에 대한 추론 과정이 합당하다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사실 정답을 맞히는 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목적은 분명 '시음 능력'을 평가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건 전문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답을 맞히면 기쁘긴 하다. 그동안 공부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고 말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본질은 '편견 없이 와인 그대로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사람은 시각적인 것에 약한 동물이다. 솔직히 나조차도 값비싸고 유명한 5대 샤토나 DRC 같은 와인 레이블을 보고 와인을 마시면 맛이 없어도 '이건 맛있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속일 것만 같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단서를 하나하나 추적해 범인을 잡아내는 '탐정놀이' 혹은 '추리게임'이라고 생각하자. 이 게임은 승패 여부보다는 과정이 더 즐거운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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