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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6. 2021

<신의 물방울>의 비밀 따라잡기

와인의 맛, 신의 물방울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와인에 빠지기 전부터 참 궁금하던 것이 있다. 그 유명한  만화책 <신의 물방울>에서 본 것처럼 정말 와인을 마시면 눈앞에 꽃밭이 마구 펼쳐지고, 깊은 숲 속에서 아련히 서있는 여인을 보게 될까?

그래서 와인을 마실 때마다 눈을 감고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려고 안간힘을 써봤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서 와인을 마시고 또 마셔보아도 전혀 무언가가 보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너무 저렴한 것만 마셔서 못 느끼는 건가 싶어서 만화책에서 나온 것과 같은 와인도 찾아서 마셔봤지만 그것 역시 별 소득은 없었다.


아, 역시 만화는 과장이었구나
내가 또 속은 거군


수많은 실패 후 그냥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서른도 훌쩍 넘은 나이에 만화책을 보고 뭘 기대한 거람?

그런데 나는 너무나도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바로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


굳이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아도 와인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그 만화가 왜 그렇게 유난스러운 표현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가끔 유난히 또렷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와인들도 있다.


그럼 그 이미지를 어떻게 보느냐? 일단 한 번에 모든 것이 그림처럼 완벽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와인의 향을 맡고 맛을 보다 보면 그 와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 조각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다 보면 그 와인이 대략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치 퍼즐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힌트 조각 찾기’이다. 말 그대로 조각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와인을 최대한 '잘게 쪼개서' 보는 게 좋다. 무작정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 하면 너무 막연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려 해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쪼개서 보려면 일단 큰 덩어리로 쪼갠 뒤, 점점 더 작은 덩어리로 쪼개나 가야 한다. 와인에서 쪼갤 수 있는 가장 큰 덩어리는 아무래도 와인의 '향''맛' 아닐까?




STEP 1. 와인의 '향' 쪼개 보기


와인의 향에는 '강도(Intensity)'가 있다. 향이 약한지 강렬한지에 따라 와인의 인상이 달라진다. 향이 약하면 뭔가 은은하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반면, 향이 강렬하면 존재감이 무척 뚜렷해져 향의 풍미에 따라 화려하거나 폭발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같은 꽃향기라고 해도 약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는 봉우리 진 꽃 한 송이가 연상되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나 풍성한 꽃다발이 연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와인에서는 워낙 다양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보니, 이 것을 좀 더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정리해놓은 '카테고리(Category)'가 있다.

처음에는 이런 카테고리가 있는 줄 몰라서 와인을 마시고 정확하게 크랜베리나 라즈베리 향이 난다는 사람들을 보면 '와~ 저 사람은 진짜 천재적인 후각을 갖고 있나 보다'라며 감탄했다. 그리고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그중 진짜 그런 비범한 후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도 카테고리의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선택지를 좁혀나가다 보니 생각보다 쉽게 그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무작정 "이 와인에서 어떤 향이 나는 것 같나요?"라고 물어보는 것보다 "과일이나 꽃향 중에 어떤 향이 나는 것 같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답변하기 더 쉬우니까.


일단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향은 크게


과일

향신료
채소
오크(기타)


이렇게 5가지의 대분류로 나뉜다.


그다음은? 가장 쉬운 과일을 예로 들어 보자. '과일'


붉은 과일
검은 과일
핵과류
열대 과일
말린 과일


이라는 중분류로 나뉜다.


이때 '붉은 과일'은 비교적 가벼운 과실의 느낌을 주며, '검은 과일'은 무겁고 진득한 느낌을 준다.

복숭아 같은 '핵과류'나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은 새콤함에 비해 달콤함이 더 강하고, 아무래도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다 보니 그런 따스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리고 '말린 과일'은 달콤함이 아주 진하게 농축되어있어 이 중 가장 달콤하다.


내가 느낀 과일의 향이 여기에서 어디에 제일 가까운지를 생각해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만약 붉은 과일향을 느꼈다면 이것은 또


크랜베리
라즈베리
체리
딸기
자두


등의 소분류로 나뉜다. 잘 따라오다가도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길 것이다.


응? 크랜베리랑 라즈베리랑은 뭐가 다른데?


와인을 공부하다 보면 이게 참 아쉽다. 아무래도 외국 술이다 보니 외국에서 즐겨먹는 식재료들의 향으로 표현된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서 크랜베리나 라즈베리를 생으로 먹을 일은 잘 없을뿐더러, 두 개를 비교해서 먹어볼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언뜻 다 비슷한 느낌이라 뭐가 다른지 몰라서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이 것만 기억해두자.


모든 과일은 작고 단단할수록 새콤하고,
크고 부드러울수록 달콤하다


크랜베리는 작고 단단한 열매라서 무척 새콤하고, 라즈베리는 작지만 부드러운 산딸기 모양이라 좀 더 단맛이 있다. 정확한 맛과 향은 직접 먹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만 알아도 과일이 가진 뉘앙스를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과일향 하나만으로도 와인에서 표현할 수 있는 뉘앙스는 무척 다양하다. 만약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새콤한 크랜베리는 새침한 아가씨, 잘 익은 자두는 농염한 여인 정도가 연상될 것이다.




STEP 2. 와인의 '맛' 쪼개 보기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와인의 첫인상을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아우~시고 떫어요"


와인의 맛은 단맛, 신맛, 타닌, 바디감(무게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맛''타닌'이 이 사단의 원인이다.


하지만 사실 '신맛'은 와인의 균형감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맛이다. 만약 아주 달콤한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꿀물처럼 신맛이 하나도 없다면? 무겁고 느끼해서 금방 물릴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신 맛이 받쳐주게 되면 그제야 마치 새콤달콤한 망고처럼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면서 와인의 인상이 무척 산뜻하고 생동감 넘치게 바뀌게 된다. 이처럼 신맛은 와인에 생기와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다. (물론 너무 도드라지는 신맛은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만 말이다.)


'타닌'은 포도의 껍질, 씨앗, 나무줄기에서 추출되는 성분인데 떫은맛을 주고 입 안에 짝짝 달라붙어 꽉 조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보통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와인에서 이런 떫은맛이 두드러지는데, 시간을 두고 숙성시키면 이 거친 맛이 사라지고 대신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자리 잡는다. (사람들이 마시기 1~2시간 전부터 와인병을 오픈해두거나 디켄터를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떫은맛을 없애고 부드러워지는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이다.)


타닌은 입 안에서의 감촉과 느낌을 결정짓기 때문에 와인의 구조와 '바디감(무게감)'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타닌이 너무 많으면 거칠고 텁텁한 느낌이고, 타닌이 부족하면 다소 밋밋하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바디감은 와인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의미하는데 '물'과 '우유'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와인의 질감과 점성이 물에 가까운지 우유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물에 가까울수록 바디감이 가볍다고 표현하고, 우유에 가까울수록 바디감이 무겁다고 표현한다.


바디감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은 알코올의 함량인데, 그래서 통상적으로 알코올이 12.5% 이하면 라이트바디, 12.5~13.5%는 미디엄 바디, 13.5% 이상은 풀바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알코올 외에 단맛, 신맛, 타닌도 바디감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단맛은 꿀처럼 무거운 느낌으로 바디감에 무게를 더해주고, 신맛은 상큼하고 날카로운 느낌으로 바디감을 좀 더 가볍게 해 준다.


와인의 단맛, 신맛, 타닌, 바디감(무게감) 중 어느 하나 도드라지게 튀지 않고 잘 어우러질 때, 와인의 '균형감(밸런스)'가 좋다고 표현한다.




STEP 3. 조합해보기


'향의 강도, 카테고리, 단맛, 신맛, 타닌, 바디감'까지 와인이 주는 힌트의 조각들은 충분히 모았다.

이 조각들을 조합해보면 와인의 인상이 조금씩 드러난다. 와인 전문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을 예로 들어보자.


향이 풍부하면서 바디감이 그리 무겁지 않은 경우 '섬세하다'라고 표현한다.


향이 풍부하면서 타닌, 알코올도 강하고 바디감이 무거운 경우 '파워풀하다'라고 표현한다.


향이 풍부하면서 타닌, 알코올도 강하고 바디감이 무거운데 신맛이 부족한 경우 '육중하다(Fat)'라고 표현한다. (밸런스가 좋지 않은 경우이다. 산뜻함을 담당하는 신맛이 빠지면 묵직함이 도드라져 느끼하고 무거운 느낌이 든다. 더운 지역에서 만드는 와인들이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다. 뜨거운 태양 때문에 포도가 너무 익어서 단맛이 강해지고 신맛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힌트 조각들이 많고 구체적일수록 인상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STEP 4. 나의 경험 덧입히기


자, 드디어 마지막 단계다.

어렴풋이 알게 된 와인의 인상을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떠올리려면 결국 나의 경험을 덧입혀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표현이라도 사람마다 연상되는 이미지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워풀하다'라는 표현에서 누군가는 잭슨 폴록의 추상화를 떠올릴 수도 있고, 필드를 누비는 축구선수를 떠올릴 수도 있다. 혹은 격렬하게 춤을 추는 BTS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본인이 듣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연상한다. 아래 글은 와인의 맛에 자신의 경험을 덧입힌 굉장히 유명한 예시 중 하나이다.


"파워풀하고 그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단맛과 톡 쏘는 듯한 신맛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야. 그거야말로 퀸의 보컬의 달콤하고도 허스키한 목소리를 중후한 기타와 묵직한 드럼으로 감싸는듯한..  뭐랄까 클래식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 이건 보다 모던한 느낌.. 역시 '퀸'이에요!"

- 책 '신의 물방울' 중


<신의 물방울>에서 주인공 칸자키 스즈키는 '샤또 몽페라'라는 와인을 전설적인 록그룹 '퀸'으로 표현했다. 당장 달려가서 한 병 사고 싶을 만큼 너무나 매력적인 표현 아닌가? 덕분에 샤또 몽페라는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가격도 거의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신의 물방울>에서 '퀸'으로 묘사된 샤토 몽페라


'샤또 몽페라'는 부드러움이 일품인 '메를로'라는 포도 품종을 메인으로 강건한 까베르네쇼비뇽과 유연한 까베르네프랑을 함께 섞어서 만든 와인이다.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면서 은근한 파워도 있고 균형감도 괜찮은 편이다. 그래서 이 와인의 어떤 모습을 보고 퀸을 연상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퀸'을 기대하고 샤또 몽페라를 샀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퀸'을 찾지 못하고 시름에 잠겼다고 한다. 아마 두 가지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 3만 원대의 저렴한 와인에서 전설적인 록그룹의 음악성에 비견되는 퀄리티를 기대하고 마셨을 경우. 아무리 좋은 평을 들었다고는 해도 샤또 몽페라는 비교적 저가인 와인이다. 가성비가 좋을 뿐이지 그랑크뤼급에 가까운 퀄리티를 기대하고 마시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만화책에서는 무려 *오퍼스원 보다 더 맛있다고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법도 하다. 아무리 맛과 가격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지만, 그래 솔직히 이건 작가가 잘못했다!)


두 번째, 와인이 주는 힌트를 전혀 포착하지 않고 마시자마자 '퀸'이 떠오르기를 기대했을 경우.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와인을 마시자마자 그 와인의 전체적인 모습이 짠! 하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와인이 주는 힌트(향, 신맛, 단맛, 타닌, 무게감 등)를 토대로 와인의 인상을 알 수 있다.


이 인상은 누구나 비슷하게 떠올릴 것이다. 와인이 주는 힌트는 객관적이니까. 하지만 그 인상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것은 주관적이기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에는 샤또 몽페라를 마시고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모든 면에서 두루 괜찮은 사람,
그런데 끌리지는 않는 사람


부드럽고 매너 좋고 남성다운 면도 있고, 딱히 거슬리거나 부족한 것은 없다. 두루두루 무난하다. 하지만 뭔가 더 매력적인 모습을 찾고 싶은데 그게 없었다. 개인적으로 임팩트 있고 강렬한 와인을 좋아하다 보니 이 와인은 내게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 것 같다.

이런 무난함을 매력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균형감이 좋고 평소에 가볍게 마시기 딱이라고. 실제로 모든 면에서 무난한 남자는 많은 여자들의 이상형이기도 하다.


사실 와인을 마시고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고 정해진 방법은 없다. 나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뿐이다. 한 마디로 '객관적인 표현(와인의 인상)'을 뽑아내고 그 위에 나의 '주관적인 표현(경험)'을 덧입히는 것.


와인을 마시자마자 느낌이 빡! 와서 '오~너무나 우아해요. 유럽의 고풍스러운 성이 보이는 것 같아요.'라고 해도 아무 문제없다.


다만 객관적인 표현 단계를 스킵하고 바로 주관적인 표현을 할 경우, 다른 사람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표현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다가가면 바로 어퍼컷을 날려버릴 것 같은 거칠고 무거운 와인을 마시면서 '오~ 이 청초한 느낌은 마치 하얀 옷을 입은 순진무구한 소녀가 들판을 뛰어다니는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 있다.

와인의 표현에 있어 개인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긴 하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뭐 어쩌겠는가? 게다가 저런 주관적인 표현을 드러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용기는 절대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와인의 맛을 표현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도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 중 하나 아닐까? 내가 와인을 마시면서 떠올린 이미지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꼈다고 생각해보자.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짜릿한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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