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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5. 2021

와인도 사랑도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

시음적기라는 게있더라고요


운명이란 게 별게 아니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서로의 인생에 자연스럽게 등장해주는 거. 그래서 서로한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거. 그게 운명이고 인생이야.

-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중


타이밍이란 언제나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서도 와인에 있어서도. 그래서 와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지금 남편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타이밍도 나름 기가 막혔기에.


남편과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꽤 일반적이었다. 먼저 결혼한 절친한 친구가 주선해준 소개팅에서 만났으니까. 보통의 소개팅을 앞둔 남녀처럼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받았고,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만날 날짜를 정했다.

그런데 세상에나! 딱 약속 전날에 내가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특히 눈 부분에 멍이 심하게 들어서 얼핏 보면 마치 판다처럼 보였고 눈의 실핏줄까지 다 터져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상태로는 친한 친구들이 보아도 흠칫 놀랄 판이라 소개팅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차마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고 날짜를 미루기로 했는데 처음에 그는 '무슨 거절을 저렇게 신박하게 하나' 싶었다고 한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만나기 싫어서 급하게 둘러댄 것 같은 어이없는 이유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고, 다행히 우리는 2주 뒤 저녁 6시에 한남동 버블 앤 코클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날, 나는 1시간 30분 동안 그를 기다렸다.


혹시나 오해를 할까 봐 덧붙이자면 그의 소심한 복수라던가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주말에 이 동네가 얼마나 번잡했는지 알지 못했던 그는 예상 도착 시간보다 10분 정도만 일찍 나왔었는데 차가 엄청나게 많이 막혔고,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가벼운 접촉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오는 내내 계속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하는 그에게 나는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조심히 오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저를 2주나 기다려줬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기다려줄게요.


남편은 이 한 마디에 나를 만나기도 전부터 이미 반했다고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따뜻하고 고운 마음씨가 느껴졌다고.


20대의 나였다면 아마 30분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한들 이렇게 무례한 사람은 만날 가치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의 진심보다 내 기분이, 내 자존심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아마 그의 매력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굉장히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20대에는 그런 배려를 받는 게 그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런 배려 하나하나가 가슴을 울리며 다가왔다.


게다가 30대 중반에 들어섰던 나는 그 당시 소개팅을 제법 많이 했었고 유독 계산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나의 시계, 가방, 신발을 차례로 훑어보더라. (사람의 시선이 레이저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 걸로 내가 얼마나 유복한 사람인지 판단하고 싶었나 보다.

그에 비해 재고 따지지 않는 그의 순수한 모습이 참 좋았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와 같은 호구 조사에 가까운 대화가 아니라 서로 카드 게임을 하며 카드 패를 하나씩 내려놓듯 즐겁게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리고 간을 보듯 자꾸 마음을 떠보는 사람들과 달리 좋아한다는 마음을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에게 나는 서서히 빠져들었다.


아마 그도 20대의 나를 만났더라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보다는 내 기분이 더 중요했던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아가씨였으니깐.


우리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만나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결혼을 했다.


인생에 타이밍이란 이토록 중요하다. 그리고 와인에도 '시음 적기'라는 말이 있다. 마시기 적당한 때가 따로 있다는 뜻인데 그럼 그건 대체 언제일까?

사실 대부분의 와인들의 시음 적기는 '출시 시점'이다. 바로 마셔도 맛이 좋다. 특히 3만 원 이하의 저렴한 와인들은 오랜 시간 진행되는 산화를 버틸만한 체력이 없어서 오히려 오래 묵히다 보면 맛이 바래거나 식초가 되어 사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운동선수처럼 타고난 체력이 좋은 몇몇 와인들만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되며, 그냥 '늙은 와인'이 아닌 '숙성된 와인'이 된다. (그리고 그런 와인들은 거의 다 매우 비싼 편이다.)


하지만 이 아름답게 숙성된 와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특히 잠재력이 클수록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프랑스의 어떤 고급 와인들은 30년 이상 기다려서 마시기도 한다. (내게 프랑스 와인들이 유독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가 따서 바로 마셨을 때 맛있는 와인보다 오랜 시간 숙성시켜야 맛있는 와인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그럼 와인이 숙성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첫 번째, 질감이 부드러워진다. 마치 까칠했던 사춘기 소년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부드러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입안을 까끌까끌하게 하던 거친 타닌이 실크처럼 부드럽게 변한다.


두 번째, 향과 풍미가 보다 풍성해진다. 와인은 숙성되면서 포도 자체가 갖고 있던 향 외에 토스트, 버터, 초콜릿, 견과류, 향신료, 나무, 담배 등 개성 있는 다양한 향을 드러내게 된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색깔을 덧입혀나가듯 말이다.


숙성이 가능한 와인들은 출시 시점을 기준으로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와 같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한 시기를 거친다. 그래서 내게 있어 와인을 언제 마실지 선택한다는 것은 '이 와인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왔을 때 만날지' 결정하는 것과 같다.

조금 서툴지만 싱그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20대 시기에 만날 것인가, 좀 더 부드럽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30대 시기에 만날 것인가, 체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그만큼 복합미와 깊이를 가진 40대에 만날 것인가.


언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냐 물어본다면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시기를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니까.  신선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달콤함이 촘촘하게 밀집된 말린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이 '시음 적기'라고 부르는 시기를 내 기준으로 보면 떫은맛이 사라지면서 안정적인 균형감을 보여주고 향의 풍미가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30대 정도의 시기부터인 것 같다.


하지만 시음 적기란 전문가에게 조차 일종의 추측일 뿐이며 정확한 시음 적기는 와인을 만든 와인 메이커 조차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시음 적기도 2020~2030년 이런 식으로 매우 두리뭉실한 경우가 많다.)

다만 어떤 지역의 어떤 포도 품종이 얼마큼 숙성력이 강하고, 특정 해의 기후와 포도 상태가 어땠는지를 근거로 언제쯤 이 와인이 멋진 어른이 될지를 예측할 뿐이다.


만약 와인의 최대한 정확한 시음 적기를 알고 싶다면? 같은 빈티지의 와인을 박스채로 사놓고 같은 보관 상태를 유지하며 매년 한 병씩 마셔보자. 그중 가장 맛있다고 느낀 해가 그 와인의 '시음 적기'이다. 심지어 그것도 와인을 마시는 본인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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