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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1. 2021

넷플릭스를 보는데 자꾸 와인이 보인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


어떡하지.

나 정말 사랑에 빠졌나 보다.


그 좋아하던 넷플릭스를 볼 때도 자꾸 와인만 보인다.

심지어 애타게 기다렸던 영화 속 주인공의 프러포즈 장면을 보고 있는데, 테이블 한편에 놓인 와인이 뭔지 궁금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그런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정지 버튼을 누르는 횟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아니, 드라마랑 영화에 이렇게나 와인이 많이 나왔었나?


(좌) 가십걸 - 돔 페리뇽  (우) 빌리언스 - 샤토 슈발블랑
(좌) 도깨비 - 드라피에, 까르뜨 도르  (우) 별에서 온 그대 - 페트뤼스  




가십걸 (Gossip Girl) 시즌 1 ~ 6


뉴욕 상류층 자녀들의 모습을 그린 미국 드라마 '가십걸(Gossip Girl)'에서는 주인공 중 한 명인 '척'이 여자 친구인 '블레어'가 화가 나면 그녀가 좋아하는 샴페인 '돔 페리뇽(Dom Perignon)'을 준비해 마음을 풀어주곤 한다.  고등학생이 돔 페리뇽을 물 마시듯 마신다니.. 역시 뉴욕 상류층은 다른 세상이구나.


'샴페인'은 프랑스 북쪽에 있는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을 의미하는데, 오직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에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 가장 고급으로 여겨지며 비싼 편이다.



 


그중에서도 돔 페리뇽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샴페인이다.

프랑스의 와인 생산업체 '모엣&샹동'사가 샴페인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수도사 '돔 피에르 페리뇽'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프리미엄 와인을 만든 것이다. 모엣 샹동 샴페인의 형님 뻘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돔 페리뇽이 비싼 이유는 '빈티지 와인'만 출시한다는 이유도 있다. (참고로 '빈티지(Vintage)'란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하는데, 만약 2020년에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다면 그 와인의 빈티지는 '2020년'이다. 이 숫자는 와인병의 레이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샹파뉴 지역은 추워서 포도가 완전히 익는 경우가 드물어 일정한 품질을 내기 위해 다양한 해에 수확한 포도를 섞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샴페인은 대부분 빈티지가 없고, 포도 작황이 유난히 좋은 해에만 따로 빈티지 샴페인을 만든다.


그런데 돔 페리뇽은 애초에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샴페인을 만들어 출시하기 때문에 1921년부터 지금까지 약 40여 차례만 샴페인을 만들었다. 그래서 작황이 유난히 좋았던 해의 돔 페리뇽 빈티지는 가격이 더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다.


드라마 속에서 블레어는 콕 집어 1995년 빈티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1995년 빈티지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어려웠던 4년간을 보낸 뒤, 오래간만에 샹파뉴 지역에 화색을 돌게 했던 아주 좋은 해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I'm the crazy bitch around here.)"


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그녀는 안 그래도 시원시원한 성격 탓에 내 최애 캐릭터인데 그냥 겉멋으로 비싼 브랜드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정말 와인에 관심이 있고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반가워 블레어~  나도 와인 참 좋아해~




빌리언스(Bilions) 시즌 1~5



'빌리언스(Billions)'는 검찰과 재벌의 대결을 다룬 미국의 드라마이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해 온 억만장자 '바비 액슬로드'와 그의 불공정 거래 의혹을 파헤치는 검사장 '척 로즈'의 이야기인데, 이 둘은 각자 돈과 권력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치열하게 싸운다. 뉴욕주 검사장 프릿 바라라와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브 코헨의 실제 법정 다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억만장자 어른의 이야기다 보니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십걸'과는 격이 다른 고가의 와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돔 페리뇽 P2'와 '샤토 슈발블랑'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돔 페리뇽이 비싼 브랜드이기는 하지만 한 병에 국내가 20~30만 원대로 일반 사람들이 접근 못할 정도로 비싼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돔 페리뇽이라고 다 같은 돔 페리뇽이 아니다. 원래 이 와인은 7년 동안 숙성을 시키는데, 포도의 품질이 유난히 좋았던 해에는 숙성 기간을 더 길게 연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장기 숙성하여 출시하는 것을 '외노테크(Oenotheque)'라고 부른다. (외노테크란 '와인 보관소'라는 의미이다. )


외노테크는 7년 이상 숙성하는 1단계, 15~20년을 숙성하는 2단계, 30년 이상을 숙성하는 3단계로 나뉜다.

하지만 외노테크는 1996년 이후 단종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플레니튜드(Plenitude, 풍부함)로 명칭을 바꿔 15~20년 숙성은 P2, 30년 이상 숙성은 P3로 출시하고 있다.

돔 페리뇽 P2는 국내가로 약 60~70만 원대이고, P3 같은 경우에는 수백만 원이 넘는 데다 구하기도 쉽지 않다.


숙성 기간이 더 길 뿐인데 왜 가격이 이렇게 비싸지는 걸까? 오랫동안 장기 숙성을 하게 되면 매년 새로운 향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척 독특하고 복합적인 향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와인의 체력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와인의 산미가 살아있고 뛰어난 밸런스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생동감 넘치는 젊은 매력과 세월의 흔적이 주는 깊은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가의 와인들은 대부분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


빌리언스 시즌3 10화에서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테이블에 앉은 일행에게 "액슬로드 씨의 선물입니다." 라며 돔 페리뇽 P2를 건네는 장면이 있다. 비록 P3는 아니지만 P2를 사람들에게 가볍게 식전주로 선물할 수 있는 재벌의 여유란 솔직히 좀 부러웠다.






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건 역시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이 등장했을 때이다. 시즌3 6화를 보면 신 몰래 먹어야 하는 악마의 요리 '오르톨랑'이라는 새 요리에 이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오르톨랑은 촉새의 일종인데 한 번 맛보면 평생 잊지 못하는 천상의 맛을 지닌 요리라고 한다. 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잔인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은 나머지 오르톨랑이 멸종 위기에 처해 현재는 요리를 금지하고 있다.)


샤토 슈발 블랑은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에서도 와인 명산지로 유명한 보르도 생떼밀리옹 지역에서 최고의 명주로 인정받는 와인이다. 여러 품종의 포도를 섞어서 와인을 만들 때, 주로 보조 품종으로 사용되는 '까베르네 프랑'을 메인으로 사용한 독특한 와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까베르네 프랑의 정점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영국의 와인 경매사 마이클 브로드 번트는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의 반열에 오른 와인이 바로 슈발 블랑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1947년 빈티지는 20세기 최고의 와인으로 평해진다.


이 와인은 2010년 스위스 제네바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샤토 슈발블랑 1947년 빈티지의 임페리얼 사이즈(6리터)가 무려 22만 4천 유로 (약 3억 5천만 원)에 팔렸기 때문이다. 와인 한 병 가격의 최고 기록을 경신한 사건이었다. 일반 와인병이 750ml인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평균 4,300만 원 수준이다. (참고로 최근 빈티지의 가격은 수백만 원대이다.)


드라마를 볼 때는 그저 군침만 흘렸었는데, 문득 그들이 마신 슈발 블랑의 빈티지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설마 1947년은 아니겠지?




도깨비



K드라마의 상징이 된 메가 히트작 '도깨비'는 불멸의 삶을 끝내기 위해 인간 신부가 필요한 도깨비에게 '도깨비 신부'라고 주장하는 '죽었어야 할 운명'의 소녀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이다.


16화에서 도깨비(공유)와 도깨비 신부인 지은탁(김고은)의 결혼 축하 파티 장면을 보면 '드라피에, 까르뜨 도르 브뤼(Drappier, Carte d'Or Brut NV)'이라는 샴페인이 등장한다. 극 중 도깨비의 친구인 저승사자(이동욱)가 도깨비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고른 와인이다.


 



드라피에(Drappier)는 프랑스에서 6번째로 오래된 유서 깊은 샴페인 하우스다. 프랑스 대통령 관저에 공식 납품하는 샴페인이며, 철저한 유기농법으로 와인을 만드는 친환경 와이너리이기도 하다.


‘까르뜨 도르(Carte d'Or)’는 ‘황금 카드’라는 의미인데, 성공과 행운을 상징하는 이 황금 카드 샴페인으로 드라피에는 수많은 유명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황금 카드(Golden Ticket)는 서양에서 '절호의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한 인생으로 입장하는 골든 티켓이 떠오르는 건 나뿐일까? 아무튼 두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간절히 바라는 저승사자의 마음이 전해지는 와인 선정이었다.




별에서 온 그대



'별에서 온 그대'는 400년 전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 도민준(김수현)과 왕싸가지 한류여신 톱스타 천송이(전지현)의 발랄한 로맨스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다. 중국에서는 거의 사회 현상에 가까울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19화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이재경(신성록)이 도민준을 도발하기 위해 천송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비싼 와인이 나온다. 이재경이 도민준의 이름으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천송이를 불러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페트뤼스(Pétrus)' 1993년에 독을 넣어 몰래 마시게 만든 것이다.


아, 저 귀한 와인에 독이라니.



 


페트뤼스는 보르도의 제왕이라고 불리며 한 병에 최소 500만 원부터 좋은 빈티지는 1000만 원 이상 나가는 초고가의 와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때 공식 만찬주로 선정되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가 아끼는 와인이어서 '케네디 와인'이라는 애칭과 함께 미국 상류 사회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00점을 준 빈티지도 수두룩하다.


페트뤼스는 보르도의 5대 샤토(샤토 마고,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샤토 라투르)에 비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래서 페트뤼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오- 드라마에서도 이제 와인 선정에 꽤 신경을 쓰는구나 싶었는데 화면에서 와인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좌) 보르도 & 부르고뉴 와인병  (우) 드라마 속 페트뤼스의 모습

 


페트뤼스는 보르도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이다. 보르도의 와인병은 어깨가 벌어진 모양인데 화면에서 본 페트뤼스의 모습은 어깨가 부드럽게 떨어져 아랫부분이 두툼한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병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코르크가 아닌 와인 오프너 없이 돌려서 딸 수 있는 스크루 캡이라니? 가짜 와인이라는 게 너무 티가나서 몰입감이 뚝 떨어졌다.

국내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디테일이 떨어지는 와인이나 가짜 와인이 주로 등장해서 김이 샐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정도면 양반이다. 국내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와인 병을 뒷면으로 돌려놔서 레이블을 제대로 보기 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 속의 와인들을 계속 눈여겨보다 보니 또 다른 재미있는 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드라마마다 유독 자주 보이는 와인이 있다.

예를 들어, 뉴욕의 싱글 여성 넷의 일과 사랑, 우정을 다룬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같은 경우, 샴페인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가 자주 등장한다.






'뵈브(Veuve)''과부'를 의미한다. 27세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남편이 운영하던 샴페인 하우스를 이어받은 마담 클리코(Clicquot)가 만든 와인이기 때문에 한때 '미망인의 와인'으로 불리면서 여자들에게 선물할 때는 기피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샴페인 하우스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게 된다. 게다가 샴페인 속 부유물과 찌꺼기를 제거하는 '르뮤아쥬(Recuage)라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 기술은 현재 모든 샴페인 사우스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미망인' 대신  '성공한 여성'을 상징하는 샴페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뵈브 클리코의 최고급  라인인 '라 그랑 담(La Grande Dame)'은 무려 '위대한 여성'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 뉴욕의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샴페인이 그렇게 자주 나오는 것 같다.  이렇게 드라마의 맥락과 맞는 세련된 와인 선정을 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낀다.


    

두 번째,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미국 드라마에는 미국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


미국 드라마 '데드 투 미 (Dead to me)'에 등장하는 와인 '조단 (Jordan)'


어떤 와인이 나오는지 눈여겨보다 보면 '조단(Jordan)'이나 '디코이(Decoy)', 그리고 '조시(Josh)' 등 미국의 데일리 와인들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데드 투미(Dead to me)'에서는 유독 '조던(Jordan)' 와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와인이 나왔다 하면 거의 다 조던이라고 보면 될 정도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주로 나파밸리를 포함한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진 와인들만 찾아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A to Z’ 같은 오레곤에서 만든 와인들도 자주 보여 무척 반갑다. (심지어 캘리포니아가 배경인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에서도 ‘A to Z’를 본 적이 있다.)

미국 와인이라고 하면 아직까지 나파밸리 와인을 최고로 쳐주지만,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깜짝 놀랄 만큼 훌륭한 와인들을 만들고 있다. 이런 와인 트렌드가 드라마에 반영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꽤나 쏠쏠한 재미다.


스페인 드라마 '오, 발레리아'에 등장한 '마초맨'


아직 프랑스나 이태리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스페인 드라마인 '오, 발레리아'에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스페인 와인 '마초맨(Machoman)'을 보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에는 프랑스 드라마에 도전해봐야겠다. 아, 그런데 내용은 안 보이고 와인만 보이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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