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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2. 2021

퇴근길이 행복해지는 와인 한 잔에 치즈 한 조각

음식과 와인의 소개팅



회사에서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정신없이 일하다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집에 돌아갈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다 보면 뭘 해도 의욕이 없고 지루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 기대되는 시간이 생기면서 하루가 온종일 무척 행복해졌다. 맞다, 그 주인공이 바로 와인이다.


오늘은 어떤 와인을 마실까? 날씨도 더우니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나 샴페인? 아니면 역시 기운 내는 데는 고기가 최고니 소고기에 레드 와인 한 잔?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다 보면 퇴근 시간 한참 전부터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온다.

와인도 사람처럼 제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상큼 발랄한 와인도 있고,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와인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와인을 마실 때면 마치 새로운 사람과 데이트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꽤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에, 10년 넘게 일에 치여살면서 '설렘'이란 남의 일처럼 느껴진 지 오래였는데, 다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래전부터 와인을 마셔온 유럽 사람들은 와인을 식사에 곁들이는 음료처럼 마신 다지만, 나는 와인은 꼭 치즈와 함께 마셔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와인바에 가면 항상 안주로 치즈를 주고,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을 많이 봤었으니까. 그래서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면 항상 치즈를 함께 먹었다. 좀 촌스러운가?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오래된 보르도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과 한 조각 먹고 사고,
치즈 한 조각을 먹이고 팔아라


달콤한 사과는 와인을 더 쓰고 떫게 만든다. 그래서 보르도의 와인 판매상들은 시음 전에 사과 한 조각을 먹었다고 한다. 사과를 먹고도 샘플 와인의 맛이 여전히 좋다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정말 맛있는 와인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반대로 치즈의 '염분'과 '지방', '단백질' 성분은 쓰고 떫은 와인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치즈 한 조각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 와인이 좀 더 풍부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고객에게 치즈 한 조각을 시식하게 한 뒤 샘플 와인을 마시게 하는 건 구매 확률을 높이는 와인 판매상들의 아주 은밀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모든 치즈가 모든 와인과 다 찰떡궁합으로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치즈도 종류가 정말 어마 무시하게 많다.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모차렐라처럼 부드러운 치즈부터 강판에 갈아먹기도 하는 아주 단단한 치즈, 그리고 냄새가 강해 호불호가 나뉘는 블루치즈까지.


매일 와인에 치즈를 곁들여 마시다 보니 치즈마다 어울리는 와인도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단 치즈와 같이 마신다고 하면 보통 레드 와인을 먼저 떠올리는데, 오히려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레드 와인이 가진 씁쓸하고 텁텁한 타닌은 치즈의 기름진 맛과 잘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우유맛과 만나면 쓴 맛이 더 강조된다. (그래서 레드와인에는 보통 수분이 거의 없어 기름지지 않은 단단한 치즈를 곁들인다.)

반대로 화이트 와인의 높은 산도는 치즈의 짠맛을 중화시키고 느끼함을 잡아준다.   


스파클링 와인은 어디에 곁들여도 안정적인 궁합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와인이다. 뭘 마셔야 할지 모르겠을 때, 스파클링 와인을 선택하면 항상 만족스러웠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와인과 치즈의 매칭은 잘 어울릴만한 사람을 소개해주는 소개팅과 같다. 같은 취향이나 가치관을 가진 남녀가 서로 잘 어울리듯, 와인과 치즈도 비슷한 구석이 많을수록 잘 어울린다는 거다.


생치즈


상큼 발랄한 어린 커플


신선하고 가벼운 맛의 생 치즈에는 무게감이 가볍고 신선한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린다.

특히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 제격이다.  

프랑스 '상세르(Sancerre)' 지역이나 뉴질랜드 '말보로(Marlborough)'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 지역에서는 소비뇽 블랑이 가진 높은 산도를 잘 살리면서 깨끗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와인을 주로 만들어내는데 그 품질이 무척 뛰어나기 때문이다.


혹은 타닌이 적고 싱그러운 과일향이 나는 가벼운 레드 와인도 좋다. '가메(Gamay)'라는 품종으로 만든 야리야리한 레드 와인도 아주 잘 어울렸다.  와인과 치즈 모두 '신선함''가벼움'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무척 잘 어우러진다.


반대로 생치즈에 오래 숙성된 묵직한 레드 와인을 곁들였을 때는 뭔가 먹는 내내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다소 느끼함까지 느껴졌다. 와인도 이전에 마셨을 때 보다 더 쓰고 텁텁해 맛이 좋지 않았다.

 

마치 독서를 좋아하는 야리야리하고 청순한 소녀에게 구릿빛 피부에 근육질인 운동선수를 소개해 준 것 같은 매칭이랄까? (로맨스 소설에서는 꽤나 어울릴법한 조합이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소프트 치즈 (Soft Cheese)


적당히 무르익은 어른 커플


까망베르나 브리 치즈처럼 부드럽고 지방 함량이 놓은 와인은 약간 무게감이 있으면서 살짝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향 (버터, 크림 등의 향)이 나는 '샤르도네(Chardonnay)'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린다. 둘 다 적당한 무게감과 질감, 비슷한 향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와인인 '릿지 에스테이트 샤르도네(Ridge Estate Chardonny)'에 브리 치즈를 곁들여 마셨을 때, 정말 입 안에서 와인과 치즈의 맛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면서 황홀하게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게 와인과 음식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거구나!'


치즈의 크리미 한 질감에 밀리지 않는 와인의 무게감, 느끼함을 씻어주는 와인의 적당한 산도, 그리고 와인의 버터향과 치즈의 감칠맛이 어우러지면서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하드 치즈 (Hard Cheese)


세련되고 우아한 중년 커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에 큰맘 먹고 산 좋은 레드 와인이 한 병쯤은 있을 것이다. 좋은 레드 와인을 마실 때 꼭 치즈를 곁들여야 한다면 무조건 하드 치즈를 선택하자!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체다, 에멘탈 같은 짭조름하고 감칠맛이 나는 하드 치즈는 묵직하고 숙성된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치즈다.


화학적으로도 치즈의 짠맛은 와인이 가진 과일의 풍미를 높여주고 쓴 맛, 떫은맛, 신 맛을 덜어준다. 게다가 와인에 떫은맛을 만드는 주범인 '타닌'이 치즈의 단백질과 만나면 떫은맛이 덜해지고, 매끄럽고 크리미 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나 '템프라니요(Tempranillo)' 품종으로 만든 와인, 여러 가지 품종을 섞은 블렌딩 와인 등 웬만큼 무게감이 있고 숙성된 레드 와인은 대부분 하드 치즈와 아주 잘 어울린다.


 '묵직한 질감'과 오래 숙성된 시간이 주는 '깊은 풍미'는 와인과 치즈를 엮어주는 공통점이다.


같은 이유로 오랜 기간 숙성된 치즈는 '오랜 기간 숙성된 빈티지 샴페인'과도 아주 훌륭한 궁합을 보여준다. 마치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륜 있는 두 남녀가 만나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블루치즈 (Blue Cheese)



너무 다른 불꽃 튀는 커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는 의외의 조합도 있기는 하다. 냄새가 꼬릿 하고 지독하기로 유명한 블루치즈에는 의외로 아주 진하고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잘 어울린다. 프랑스 소테른에서 만든 달콤한 '귀부와인(Noble rot)'이나 캐나다에서 만든 '아이스와인'처럼 말이다. 꼬릿함과 달콤함이라는 속성은 무척 달라 보이지만 '강렬함'이라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이기에 잘 어울리나 보다.





와인과 치즈를 워낙 자주 먹다 보니 종종 사람들을 초대해서 먹는 경우도 생겼다.

처음에는 그냥 그릇에 치즈만 쑹덩쑹덩 썰어 내어 주었는데, 이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지 않은가? 좀 더 있어 보이는 플레이팅을 고민하게 되었고, 나 같은 곰손도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는 몇 개 레시피를 알게 되면서 내 눈도 즐겁고, 초대받은 사람들도 더 기뻐하게 되었다.


부라타 치즈


'부라타(Burrata) 치즈'는 수란처럼 고체와 액체 사이의 질감을 가진 생치즈다. 모차렐라나 까망베르 등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다른 치즈에 비해 비교적 낯선 편이라 손님들에게 대접할 때 다들 무척 신기해했고 맛도 호불호 없이 반응이 좋았다. 

부라타 치즈의 매력은 입 안에서 신선하게 느껴지는 진한 우유맛과 부드러운 질감인데, 여기에 올리브 오일과 후추만 뿌려도 아주 훌륭한 안주가 된다. 나 같은 요리 곰손도 순식간에 준비할 수 있는 너무나 쉬운 치즈 안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좀 더 손님들에게 그럴싸하게 대접하고 싶을 땐, 슬라이스 된 하몽으로 둥근 부라타 치즈를 감싸주고 샐러드 위에 올려주면 꽤나 근사해 보인다.



까망베르 치즈, 브리 치즈



가장 무난한 까망베르나 브리 치즈도 아주 쉽게 근사해질 수 있다. 치즈 위에 견과류를 올리고 오븐에 살짝 구워준다. 그리고 그 위에 꿀을 휘리릭 뿌리면 끝! 단짠단짠에 고소한 견과류의 풍미까지 곁들여진 꽤나 풍부한 풍미를 가진 안주가 순식간에 완성된다.

사과를 잘게 썰어 볶은 다음 치즈 위에 올려 오븐에 구워주고 꿀과 시나몬 가루를 뿌려도 정말 훌륭하다.



와플 + 브라운 치즈


브라운 치즈는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름 신상 치즈인데 (아마 2019년쯤부터 수입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치즈의 짭조름한 맛에 캐러멜처럼 달콤한 맛이 가미된 갈색빛이 나는 독특한 치즈다. 태생부터 단짠단짠이랄까? 따끈한 와플 위에 강판으로 갈아 솔솔 뿌려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단 맛이 강해 식사 후에 디저트와 함께 달콤한 와인에 곁들여 마시는 게 좋았다.





일에 치여 고단한 하루도 와인 한 잔에 치즈 한 조각이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힘들었던 당신, 오늘 함께 건배하자~!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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