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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Oct 15. 2021

직장인의 와인 선물 : 상무님, 이게 제 마음입니다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굉장히 다양하다. ‘사랑해’라는 말로 진심을 전할 수도 있고, 장문의 편지로 지금 느끼는 감정을 줄줄이 적어 보낼 수도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나 절절한 노래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선물'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받는 사람의 취향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민과 정성으로 점철된 사랑스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면 주는 사람의 마음도 설레니깐. 


나는 와인에 빠진 이후로, 주로 와인을 선물하면서 나의 마음을 전했다. 


와인 한 병에는 굉장히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다. 와인의 이름, 와인을 만든 사람에 대한 스토리, 와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지금 이 와인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까지. 그래서 상황에 잘 맞아떨어지는 메시지를 가진 와인을 선물하면 말이나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와인을 선물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된 적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이유로 실패한 적도 있었다.





첫 번째 와인 선물 


스택스 립 와인셀라, 핸즈 오브 타임 샤도네이 

Stag's Leap Wine Cellars, Hands of Time Chardonnay 


'스택스 립'은 미국의 유명 와이너리이다. 프랑스 와인만이 고급 와인으로 취급받던 시절,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들과 겨루어 당당히 1위를 차지한 혁명적인 와인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이 와이너리에는 석회석으로 된 여러 개의 핸드 프린팅 현판이 있다. (마치 할리우드의 명예의 거리처럼 말이다.) 이 현판들은 오늘날의 위치에 우뚝 서기까지 많은 공헌을 한 와인 메이커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설치되었는데, '핸즈 오브 타임(Hands of Time)'이라는 와인은 라벨에 이 핸드 프린팅 현판의 이미지를 옮겨 담음으로써 다시 한번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와인은 내가 선물한 와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이다. 처음으로 친구나 지인이 아닌 회사 상사, 그것도 까마득히 높은 상무님께 드렸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라! 이건 뇌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니라 작별 선물이었으니깐. 


솔직히 회의나 보고할 때를 제외하면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손에 꼽지만, 나에게 있어 그 상무님은 단순한 직장 상사라기보다는 좀 더 특별한 존재였다. 일단 주변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여성 임원이라는 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후에도 직장에서 리더로서 인정받는 사람이기에 내 눈에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직장 생활의 멘토로 보였다. 


게다가 사원/대리급 직원들까지 무척 세심하게 챙기는 편이었는데, 의외로 그런 작은 섬세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더라.

이번에 새로 온 디자이너야.
얘 진짜 일 잘하는 애니까
앞으로 같이 잘해보도록 해. 


내가 처음 출근한 날, 상무님이 내 팔을 잡아끌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가 한 말이다.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임원에게 그런 신뢰 가득한 말을 들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깐. 


그래서 그 상무님 아래에서 일하는 동안 유난히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 물론 새로 들어온 직원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빈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빈 말 조차 안 하는 게 대부분 아닌가? 


그리고 몇 년 뒤, 상무님이 안정적인 대기업 임원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퇴사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안정적인 상황에서 도전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무척 하기 힘든 일이다. 특히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그렇다. 겨우 일개 월급쟁이인 나조차도 자꾸만 안주하려는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데 임원이면 오죽할까? 그래서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마움, 아쉬움, 존경, 응원..' 전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 많은데 어떻게 이런 마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결국 나는 와인 한 병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스택스 립 와인셀라, 핸즈 오브 타임 샤도네이(Stag's Leap Wine Cellars, Hands of Time Chardonnay)다. 


스택스 립 와이너리의 핸드 프린팅 현판 


나는 이 와인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당신은 우리가 이뤄낸 성과에 굉장히 큰 공헌을 하신 분이기에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일한 시간은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도 지금처럼 멋진 성과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말이나 글로 전하기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낯 뜨거운 표현이다. 하지만 와인이기에 이런 메시지를 담백하게 전할 수 있었다. 


쇼핑백에 예쁘게 포장된 와인과 이 와인에 대한 설명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담아 드렸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다. 


상무님의 개인 번호로 내게 전화가 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송별 선물로 와인을 선물해줬구나 싶어서 고마운 마음만 들었는데, 함께 동봉된 편지에서 와인에 대한 설명을 읽고 너무 감동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깊은 의미가 담긴 선물인 줄 몰랐다며 통화하는 내내 무척 고마워하셨다. 밥이라도 사 줄 테니 언제든지 새 직장으로 놀러 오라고, 내 마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통화를 마쳤는데 어찌나 뿌듯하던지. 


평소에는 말도 섞기 어려운 까마득히 높은 직장 상사, 게다가 내가 존경하는 상사에게 이런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무척 놀랍고 기뻤다. 


와인이 가진 메시지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그리고 와인은 으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시기 마련이니, 와인이 가진 이런 흥미로운 스토리는 좋은 안주거리가 되지 않을까? 상무님이 이 와인을 마실 때, 나의 마음과 이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시간을 떠올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두 번째 와인 선물 

릿지 몬테벨로 

Ridge Monte bello


'릿지 몬테벨로'는 위에서 언급한 '스택스 립 와인셀라'와 같이 미국 와인과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을 비교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참여한 와인이다. (워낙 유명한 이 사건은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린다.) 미국 와인 6종, 프랑스 와인 4종 이렇게 총 10종의 와인이 경쟁을 했는데 ‘스택스 립 와인셀라’는 1위, ‘릿지 몬테벨로’는 5위를 차지했다.

싸구려로 생각했던 미국 와인에게 크게 한 방 먹은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지만, 이내 프랑스의 와인은 숙성이 되어야 진가를 발휘한다며 재대결을 요청한다.

그리고 30년 뒤인 2006년에 똑같은 와인들로 재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기가 막히게도 이번에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미국이 싹쓸이해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대결에서 1위를 한 와인이 바로 '릿지 몬테벨로'이다.


이 와인은 나의 야심 찬 선물이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완벽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메시지를 가진 와인을 찾았다고 무척 좋아했는데 왜 실패했을까? 


내게 쓰디쓴 실패의 맛을 안겨준 이 와인을 받은 주인공은 나의 옛 직장 상사였다. 

첫 번째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지원해 면접을 봤을 때 나를 뽑아주신 분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한 뒤에도 간간히 안부를 전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 그분도 대기업을 떠나 (아주) 잘 나가는 스타트업의 디자인 총괄 역할을 맡게 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록 함께 일한 시간은 짧았지만,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었기에 꼭 축하드리고 싶었다. 이왕이면 와인을 통해서 말이다! 지난번에도 퇴사한 상무님에게 와인을 선물해서 가슴 벅찬 피드백을 받지 않았던가?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어떤 와인을 선물할까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한 와인이 바로 '릿지 몬테벨로 (Ridge Monte bello)'이다. 


나는 그분의 말랑말랑하고 유쾌한 사고방식,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창의력이 샘솟게 만드는 자유분방한 면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내심 딱딱한 대기업보다는 자유로운 스타트업에서 더 많은 일을 해내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와인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지금도 훌륭히 잘 해오셨지만, 다음 직장에서는 훨씬 더 멋진 결실을 맺으실 수 있을 겁니다."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세기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5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두 번째 재대결에서는 무려 1위를 차지했기에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딱 들어맞는 와인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걸 받고 얼마나 좋아하실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편지 한 통과 와인을 곱게 포장해서 택배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분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어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고맙지만 많이 부담스러우니
다시는 이런 고가의 선물은 보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아, 그렇다. '가격'도 와인이 가진 메시지 중 하나였다. 


네이버에서 검색해 본 '릿지 몬테벨로 (Ridge Monte bello)'의 소비자 권장가는 무려 51만 원이었다. 물론 할인 행사를 통해 그 절반 정도의 가격에 구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는 순간 가슴이 묵직해지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특히 와인 애호가가 아닌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그분은 유독 돈을 좇아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성향이 잘 맞지 않았고, 사치품에도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니 딱히 좋아하는 품목도 아닌데 가격은 부담스럽게 비싼 이런 선물을 받고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셨을까?


나는 와인이 가진 의미에 너무 매몰되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선물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받았을 때 기뻐할 만한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인사팀을 위한 와인 선물 추천 


내가 와인을 좋아하고 공부한다는 것이 소문이 나자, 회사에서는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러던 중 인사팀에서 일하는 지인에게서도 임원과 직원들에게 추석 선물로 돌릴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예산에 맞춰서 최대한 맛있는 와인들을 찾아 다양한 생산지, 품종으로 이루어진 추천 리스트를 보냈다.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등 종류도 다양하게 말이다. 하지만 몇 번의 추천 리스트를 보낸 뒤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은 '숙성 등급별 스페인 와인' 리스트였다. 


스페인 와인은 숙성 기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데, 등급 이름이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꽤 직관적이다. 누가 봐도 '리제르바' 보다는 '그랑 리제르바'가 더 좋아 보이지 않는가? 


크리안자 (Crianza) : 최소 2년 숙성 (오크통 6개월 이상 숙성) / 레드 와인 

리제르바 (Reserva) : 최소 3년의 숙성 (오크통 1년 이상 숙성) / 레드 와인 

그랑 리제르바 (Gran Reserva) : 최소 5년의 숙성 (오크통 2년 이상 숙성 + 병입 후 지하 셀러에서 3년 숙성) / 레드 와인 



개인적으로 이렇게 추천해주는 건 조금 성의 없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와인인데도 불구하고 등급이 나뉘고, 등급이 알기 쉽다는 이유로 인사팀에서는 이 리스트를 무척 좋아했다. 

임직원 모두에게 통일감을 줄 수 있으면서, 와인을 잘 모르는 임원에게도 직원용보다 더 좋은 와인을 준다는 것을 쉽게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스페인 와인은 가성비가 무척 좋은 편이다. 비용 면에서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 인사팀에서 원한 건 '예산 내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이 아니었다. 


선물이건 추천이건 역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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