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흔한 시뻘건 색부터 핑크, 노랑, 진회색 그리고 수술실에서 쓰이는 파란색 라텍스 장갑까지 색상과 종류도 다양하다. 10년 차 이상의 진정한 설거지 덕후라면 고무장갑 또한 탁월함을 꿰뚫는 감식안이 생기고, 수집 품목에 포함될 수 있으리라.
실력 있는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시기에 따라 고무장갑을 가리는 것은 필요하다.
가족들이 사용한 그릇과 수저 등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설거지의 1차 목표라면, 가능한 한 빨리, 쾌적하게 설거지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것 또한 프로 주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무더운 날씨에 땀이 차는 여름에는 손목 바로 위에서부터 맨살이 드러나는 기장이 짧고 부들부들한 아이를 찾게 된다. 요즘 같이 쌀쌀한 날씨에는 안감이 기모로 덮인 따뜻하고, 외피가 두꺼운 아이를 자연스레 손에 끼게 된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고무장갑이 갖춰야 할 제1 덕목은 기름기와 세제가 덕지덕지 묻은 그릇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찰력이 높은 패턴을 사용하는 것이다. 외피의 패턴이 맨질맨질하고 단순한 고무장갑으로 그릇을 잡고, 돌리고, 뒤집고, 수세미질을 하다 보면 높은 확률로 '미끄덩' 손에서 빠져나가는 아찔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악' 소리와 함께 개수대 밖으로 아끼는 접시나 머그컵이 떨어져,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는 경우가 흔하다.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그 순간만큼은 날아가는 그릇이 일순간 정지한 듯 시간이 슬로 템포로 가더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손바닥의 패턴이 복잡하고 오돌토돌한 고무장갑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물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급하고 화끈한 기질 탓에 접시가 깨져라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는 경우가 태반이더라.
해가 갈수록 고무장갑의 내구성이 점차 낮아지는 것만 같다. 툭하면 '손가락 끝과 사이의 물갈퀴 살 부위'가 자그마한 실 빵꾸가 나고 찢어진다. 그 틈으로 물이 스며드는 경우가 유난히 많더라. 한 달 지나면 냉큼 버리고, 신품을 사게 하기 위한 상술이라는 추측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물든 억측일까? 아니면 내가 설거지에 심취하고 흥이 오른 나머지 격한 움직임을 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곁에 머무르는 인간이든, 소소한 물건이든 한번 맺은 인연은 가능한 오래 지켜보고 쓰자는 주의다.
고무테이프를 붙여보고, 순간접착제도 써보고 해 봤지만 한번 뚫린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물의 힘을 견뎌낼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그저께 아끼던 고무장갑 한 짝의 엄지와 검지 사이 물갈퀴가 또 말썽이길래 한참을 고민했다. 불현듯 베란다 창틀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동네 잡화점에서 구매한 실리콘이 떠올랐다.
"이거면 왠지 성공할 거 같은데?"
이번에는 멀쩡한 고무장갑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듯한 예감이 들었다. 치약처럼 짜내는 튜브형 실리콘을 그 아이의 구멍 난 곳에 살짝 점을 찍듯 발라주었다. 하루 정도 서늘한 곳에서 말려주면 작업 끝!
오늘 저녁, 응급 처치에 성공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에 도전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 더미를 해치우고 난 소감을 말하자면.. 더 테스트해 봐야겠지만, 당장은 효과 만점이었다. 실리콘의 접착력도 우수하고, 방수도 완벽하다. 실리콘 건이 필요하지 않은 튜브형이니 유지 보수하기도 편하다. 만약 이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 고무장갑과의 질긴 인연은 끝내 다한 것이다. 누수를 무릅쓰고 설거지를 하던가 아니면 쿨하게 이별하면 된다.
아무튼 평균 수명 한 달을 넘기기 힘들던 고무장갑의 수명이 이렇게 두세 배로 늘어나니, 제조 회사들은 바짝 긴장해야 할 것이다. 고무장갑을 만드는 제조사들이여, 앞서 말한 고무장갑의 취약 부위 내구도를 조금만 더 업그레이드해달라. 단, 판매가는 그대로 두고.. 나도 귀한 시간을 들여 이런 꼼수를 찾고, 글로 옮겨 이렇게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무장갑을 끼고 사포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 6개월 정도는 버텨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같이 돈 벌어먹기 고달픈 인플레 시대에 말이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구멍을 막아준 투명 실리콘이 보이는가? 작은 틈이라면 순간접착제를 얇게 발라주어도 효과 만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