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머니의 뒷모습

2020년 5월 3일

by 라미루이

어버이날을 앞두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집에 초대했다.

친할머니가 현관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다소 어색한 인사를 하고, 어머니는 가지고 온 과자며 과일, 계란이 담긴 가방을 건넨다.

할머니의 짐을 받아 들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슬쩍 들여다보는 아이들, 군것질 거리를 발견하자

"헤에~"하고 속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 예솔이, 하연이 그새 많이 이뻐졌네. 다리가 길쭉하니 키가 얼마나 크려고 그러니.


아이들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지며 미적미적 자리를 피한다.

시원한 마룻바닥에 앉자마자 어머니는 어제 교외로 멀리 다녀온 얘기를 풀어냈다.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외조부모의 유골을 모신 해인사 미타원에 다녀오고,

막내 이모가 최근에 자리 잡은 구래라는 곳에 마련한 서고를 찾았다고 한다.

몸이 편찮으신 혜자 이모가 계신 요양원도 들려서 다른 이모들과 함께 오리고깃집에 들려 푸짐한 저녁을 드셨다네.

자세히 보니 어머니의 왼쪽 눈은 피로 탓인지, 눈병 탓인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어 있다.


- 어머니, 눈이 벌겋네?

- 요즘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간지럽고 따갑고 괴롭더니 결국 탈이 나더라.

병원 다녀왔더니 결막염이라고 안약 넣으래. 하루 세 번...


안약보다는 충분한 휴식이 먼저인 듯하여 너무 돌아다니지 말고 푹 쉬시라 권했다.

아내가 오전부터 정성껏 준비한 토마토 파스타에 샐러드를 먹고, 커피를 마신 뒤 아이들과 간단한 보드 게임을 즐겼다. 게임에 익숙지 않은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비바 토포"의 게임 규칙을 알려주는 아이들.

일곱 살 아이도 즐길 수 있는 어렵지 않은 게임이기에 다 같이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점심 먹은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머니 속이 더부룩하다길래 소화도 시킬 겸, 바람도 쐴 겸 집 근처 맨발 공원을 찾았다. 아내는 시어머니 오신다고 이래저래 마음 쓰고, 식사 준비하느라 지쳤을 테니 집에서 쉬라 하고...


아이들은 분수대 주위를 빙그르 돌며 킥보드를 타고, 어머니와 난 오돌토돌한 돌기가 나 있어 지압 효과가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랜만에 조용히 대화도 나눌 겸 함께 움직이려 했는데 어머니는 홀로 산보를 하고 싶으셨는지 어느 순간 사라지셨다.

제일 높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두 개까지 성공했다. 네 번 정도 매달려 총 열 개 정도 턱걸이를 한 듯하다.

어느 할아버지는 중간 높이 철봉에 가볍게 오르더니 한 세트에 열 개 넘게 턱걸이를 하더라

괜스레 뿌듯한 초심자의 마음은 가라앉고, 철봉 수련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것을 깨닫곤 너무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리라 결심했다.

어머니는 야트막한 산자락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산철쭉을 둘러보시다가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다. 나무 벤치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귀 밑 새치가 희끗한 것이 세월이 그만치 흐른 듯하여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누워 낮잠을 즐기니 어느새 저녁때가 다가왔다. 각종 나물과 채소를 넣어 고추장을 쓱싹 넣어 버무린 비빔밥이 식탁에 올랐다.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어머니가 가져오신 참외 서너 개를 깎아 나누어 먹는다. 아유 시원하다 달다 하며 아이들이 연달아 먹는 모습이 귀여운지 어머니는 연신 한 조각 더 먹으라 권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네. 이만 가봐야겠다.


본가로 바래다 드릴 시간이 되어 장모님이 텃밭에서 기른 상추, 쑥갓, 겨자잎 등을 바리바리 싸드리니 고맙다는 말을 사부인에게 전해달라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신신당부하는 어머니.


-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 어머니, 저희가 시간 편하실 때 아이들 데리고 찾아뵐게요.

- 그래, 그래.


손녀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충혈된 한쪽 눈이 더 붉어지는 그녀. 서둘러 현관문을 나서더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행당동 본가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잠깐 들어왔다 가라 하셨다. 아들 왔다고 괜히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늦은 시간에 지치고, 성가실 듯하여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손을 저었다. 홀로 쓸쓸하게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잠시 머무를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집에 돌아오니 내일모레 어린이날이라고 손주들 옷 사서 입히라고 십만 원을 아들 모르게 아내에게 주었다네. 너무 큰돈을 받은 듯하여 송구스러워 용돈을 보내드리겠다고 전화로 말씀드렸다. 눈치 보는 아들 마음 헤아려 조심조심 건네는 말


- 나 걱정 말고 너희 살 길이나 부지런히 찾거라.

-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니는 푹 쉬시고, 안약 자주 넣으세요. 코로나 조심하고, 사람 많은 데 가지 마시구요.

- 그려 알았다. 보내준 용돈 잘 쓰마.

- (나중에 형편 트이면 더 많이 보내드릴게요.) 예, 들어가세요


마음 같아선 살아가는 근심 크게 덜어드릴 만치 큰 금액을 드리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답답하고 아쉬울 뿐이다.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자주 찾아가 얼굴 보이고, 떠들썩한 아이들의 장난과 수다에 노구老嫗의 외로움이라도 덜어드리는 것이 도리인 듯하다. 언제쯤 이리저리 계산하지 않고 어머님께 실질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고심하다가, 명치 아래가 턱 막힌 듯 체기가 느껴져 찬 보리차를 한 잔 들이켰다.


그날 맨발공원에 흐드러지게 핀 산철쭉..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로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