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itudine Vincimus 인내로써 정복한다" 섀클턴 가문의 모토, <궁극의 탐험 White Darkness>_데이비드 그랜
일요일 오전 11시 즈음, 아이들은 이미 깨어나 활동을 개시했다.
큰딸 예솔은 암체어에 비스듬히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Teen Titans Go> 시즌 4의 박력 넘치는 오프닝이 티비 스크린을 채운다. 동생 하연은 언니 곁에서 티비를 보다가
이내 지루해하며 자신의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글밥 적은 그림책을 몇 장 읽다가 덮고는, 작은 공책을 펼쳐 한 페이지를 4칸으로 나눈다. 칸칸이 다람쥐며 강아지, 야옹이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리고, 서로 대화하는 말풍선도 띄우면서 혼자 놀기 삼매경에 빠진다.
그나저나 오늘 뭐하고 지내야(버텨야) 하나?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확산되면서 아이들과 갈 곳이 정말 정말 마땅치 않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사방이 막힌 실내 공간은 위험하다.
코로나 시대 이전(불과 6개월 전)에 즐겨가던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은 이미 문을 닫고 출입을 제한한 지 오래다.
고민 고민 끝에 아이들과 함께 자주 가는 곳을 간추리면 세 곳 정도다.
1. 그나마 자연과 접할 수 있고, 여유 있는 거리두기가 가능한 평일의 관악산 계곡.
(휴일은 이른 시간부터 등산객들이 빼곡하게 모이므로 해 질 때쯤 찾는 것이 여러 모로 편하다.)
집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숨통을 트여줄 수 있고, 오며 가며 1시간 남짓 걷기를 통해건강을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더운 여름날, 수심이 깊지 않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잠자리채를 동원해 민물고기도 잡아 볼 수 있는 근사한 경험을 선사한다.
예부터 관악산은 불의 기운이 강한 화산으로 수량이 넘치진 않지만,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꽤 많은 계류가 흐르는 편이니 아이들과 한나절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2. 인근 맨발공원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공원이다. 아이들과 맨발로 걸을 수 있게 오돌토돌한 지압 산책로가 공원 외곽을 빙 둘러 조성되어 있다. 공원 가운데 조그만 인공 분수가 마련되어 있는데, 7~8월에 한시적으로 가동된다. 분수 주변에서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고, 배드민턴을 즐기는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복부, 하체 운동이 가능한 각종 기구들과 철봉, 평행봉이 있어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체력 단련에 힘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공원 주위가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이라 여력이 된다면 1시간 정도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3. 아파트 주차장 겸 놀이터
이래저래 가까운 곳이 최고다 할 때는 가볍게 아파트 옆 주차장으로 나간다. 주차장과 붙어 있는 놀이터가 있어 시소, 미끄럼틀을 즐길 수 있다. 다만 연식이 오래된 모래가 깔려 있어 냥이들 똥이 지천이라 신경이 다소 쓰이는 게 사실. 엄마들은 질색하며 놀지 못하게 하지만, 뭇 아빠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맨발로 밟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모래와 뭉쳐진 응가를 보면 피해 다니라고 잔소리만 하는 편.
서너 살 아이들은 호기심이 폭발한 나머지 손으로 응가를 만져보기도 하는데 아무리 통 크고 대범한 아빠라도 그것만은 질색하며 말리더라.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탓에 항상 짙은 그늘이 가려져 한낮에도 시원한 편.
이 동네가 관악 골짝을 타고 불어 내려오는 산바람이 센 편이라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그나마 버틸 수 있다.
비어 있는 주차장 경사로를 따라 킥보드를 타고, 스카이 콩콩을 타다 보면 어느새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그러면 누가누가 이기나 킥보드 경주도 하고, 줄넘기 내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1시간쯤 지났을까.
어떤 친구들은 태권도 학원 셔틀버스가 데리러 오고, 몇몇은 (지겨운) 온라인 수업을 마저 듣는다며 축 처진 어깨로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런다. 우리 아이들은 학원도 다니지 않고, 온라인 수업을 다 마치고 나오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제풀에 지칠 때쯤 집으로 들어간다.
온통 벌게진 아이들의 얼굴과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 숨이 가빠 벌렁이는 가슴...
이렇게 힘을 빼고 신나게놀아줘야 밤에 뜬 눈으로 허튼짓 안 하고, 곤히 잠들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이렇게까지 활동 반경이 줄어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이들을 태우고 여기저기 누비던 자동차는 주차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고,
한 달 전에 가득 주유한 기름통이 아직 반 넘게 남아있을 정도. 지구 온난화로 인해 극지의 빙하가 녹으면서 갈수록 살 곳이 없어진 북극곰의 신세와 지금의 우리가 묘하게 겹쳐지는 건 왜일까?
자신의 몸을 겨우 버틸만한 좁다란 부빙浮氷에 기우뚱 서서 먼 바다를 애처로이 바라보는 곰과
집 베란다에 서서 창 밖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파자마 차림의 나.
지금은 정부와 의료진의 노력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하고 있지만, 만약 코로나 발병 상황이 악화되어 집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셧다운으로 치닫는다면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어진 흰 곰이 결국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비극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건 무슨 연유인지.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아 마냥 좌절하고, 맥없이 꺾인 채 아이들과 함께 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갈수록 좁아지고 발 디딜 곳 없어지는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또한 되돌리기 위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외출 시 마스크를 쓰고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이들이 지금 상황에 답답해하고, 괴로워하고, 고립되지 않도록 부모 입장에서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후에 아이들이 자라서 코로나 시대는 그런대로 버틸만했다고, 우리 부모는 좁은 집구석에서 자신을 즐겁게 해 주려 많은 시도를 했다고 떠올렸으면 한다.
인간은 달라진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면서 살아남는다.
다만, 그런 적응의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고, 무난하게 흘러가지는 않더라.
한참을 멍 때리다 단단히 얼어붙은 아빠를 "꽁" 깨뜨리는 하연이의 물음
- 아빠, 오늘 뭐할 거야?
- 글쎄, 뭐하지?밖에 나가서 놀까?
- 음...(별로인 듯...) 아빠 근데 그거 안 해?
- 뭐?
- 그거 말이야, 그거 해봐?
- 뭐 말이야?
- 100인의 아빠단 미션 안 해?
아, 맞다. 100인의 아빠단 미션이 있었지. 그래, 일단 지금은 백인의 아빠단 미션을 해보자.
각 지역에서 매년 100명의 아빠를 선정해 각종 미션, 행사를 진행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활동을 하게 되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매주 미션을 알려주는데 이번 주는 아이들의 건강한 음식 거리를 마련해주자는
취지의 보물찾기 놀이다.
아이들과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더불어 건강도 챙길 수 있으니 꿩 먹고 알도 챙길 수 있는 놀이가 되겠다. 놀이 진행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1. 엄마, 아빠는 이면지를 8 등분하여 각각의 종이에 음식 이름을 적는다.
단, 몸에 이로운 음식 5가지와 해로운 음식 3가지를 구분하여 적는다.
(예. 이로운 음식: 밥, 김, 상추, 파프리카, 오이 등등
해로운 음식: 아이스크림, 사탕, 젤리 등등)
2. 아이들은 1번 종이에 적은 음식 이름을 보고 떠오르는 그림을 그린다.
다람쥐 인형 '라미'의 찬조 출연
3. 엄마, 아빠는 2번 종이를 집안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 놓는다.
책장에 끼워놓은 부채 뒤에 슬며시 숨겨둔 보물
4. 잠시 후 아이들은 보물을 찾기 시작하고, 하나씩 찾을 때마다 부모에게 가져와 보여준다.
아이스크림, 사탕, 젤리 등 해로운 음식을 발견했을 경우 건강 벌칙을 수행한다.
(우리는 앉았다 일어섰다 스쿼트 동작을 3회 반복했음)
자신이 찾은 해로운 음식을 바꿔치기하려는 언니의 꼼수
5. 엄마, 아빠는 몸에 이로운 음식 5가지를 활용하여 샐러드, 볶음밥, 김밥 등 가능한 요리를 식탁에 올린다.
6. 마지막으로, 맛있게 먹는다!
엄마, 아빠가 잠깐이라도 힘을 내어 적극적으로 놀이에 참여하니 아이들의 표정도 한껏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