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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곳을 떠올리다
우리 집 양변기는 온기를 잃을 틈이 없다
by
라미루이
Dec 5. 2020
으으, 마렵다 마려워.
오줌보를 움켜쥔 아이가 화장실로 달려간다.
으웩, 응가 냄새가 지독해. 숨을 못 쉬겠어.
아이가 숨을 참고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인다.
미안, 환풍기 누르는 걸 깜박했네.
멋쩍어하는 아내가 뒤늦게 환풍기 스위치를 콕 누르고는
종종걸음으로 피한다.
엄마, 매너 꽝이야. 진작에 환기를 시켰어야지.
더 이상 요의를 참을 수 없었는지
한 손으로 코를 빨래집게처럼 틀어막고
엉거주춤 변기에 쭈그려 앉는 아이가 한마디 보탠다.
그래도 엄마가 오래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뜨뜻해서 좋아.
12월 어느 날 아침, 차디찬 얼음장 변기에 앉는 것만큼 최악은 없지.
비록 엉따 기능이 없는 우리 집 변기라지만
온기를 잃고 조금이라도 식을라치면
온 가족들이 번갈아 다가와 볼기짝을 비비고 따스하게 덥혀놓는 통에
항상 떨어지지 않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지.
***
간밤에 물을 많이 마신 탓일까?
새벽녘에 잠이 깨어 비몽사몽간에
맨살을 훤히 내놓고 변기에 엉거주춤 앉을라치면
쩍쩍 달라붙는 냉기에 소스라치는 대신
들들 끓어오르는 시골집 온돌방 아랫목처럼 덥혀놓은 누군가의 배려심에
안도하며 깜박 잠들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더라.
이제야 궁금하기도 하지.
아내와 아이들은 곤히 잠든 지 오래
어둠에 잠긴 오밤중 화장실에
밤도둑처럼 머무른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딸꾹, 딸끅, 그윽..
어디선가 희미하게,
꾹 눌러 참았다가 연신 터지는 딸꾹질 소리가 선잠을 깨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소리.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탱하던 앙상한 등골을
무너뜨릴 것처럼 울려대던 그 성마른 소리
굽어진 등을 아무리 쓸어내리고, 두드려도 멈추지 않았지.
그 지랄 맞은 딸꾹질 소리를 다시 들을 줄이야.
위 아랫집의 기척을 살피고, 주위를 둘러봐도
고요하기만 한 것이 요상하다.
아들이 근심할 줄 알고 서둘러 물러가신 걸까.
가족 간에 그리 눈치 보고 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 주무시는 저 세상에서라도,
토막 난 새벽잠 어설피 깨어 용무 급하시면 종종
저희 집 들러 냉랭한 변소 간에 혼기
魂氣
라도 남겨주시면
당신 보고픈 그리움 주저앉힐 듯합니다.
우리 집 양변기는 좀체 온기를 잃을 틈이 없다.
백주대낮에는 이 세상,
모두가 잠든 밤에는 저짝 세상에 속한
가족들이 찾아와 제 몸처럼 덥혀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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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화장실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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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두려 하는 딸둘아빠입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글감을 건지려 촉을 세웁니다. 상상을 버무려 잠시나마 현실을 잊는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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